이민호 | 꽃보다 화살표 청년

여대생 금잔디(가명, 23) 씨는 길치다. 방향 감각이 제로인 탓에 버스도 매번 반대 방향에서 타기 일쑤. 약속 장소에 늦거나 요금을 날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매사에 덜렁대던 그녀는 그날도 어김없이 낯선 버스 정류장에서 헤매고 있었다. 버스 노선도를 유심히 살펴보던 중, 문득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F4 구준표 즉 이민호의 곱슬머리가 아닌, 바로 ‘화살표 청년’ 이민호 씨의 빨간 화살표였다.

사진 _ 김소윤/제18기 학생 기자(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손지윤/제18기 학생 기자(숙명여자대학교 역사문화학과)

단돈 8백 원의 지혜


누구나 한 번쯤 서울 버스 정류장에서 화살표 스티커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각 버스 노선도에 붙여진 빨간 화살표 스티커는 현재 정류장 위치와 타고 갈 버스의 방향을 명쾌하게 알려 준다. 아마도 대부분 이를 서울시의 편의를 위한 후반 조치로 생각했겠지만, 아서라! 단 한 사람, ‘화살표 청년’ 이민호(23세, 멀티미디어학과) 씨의 노고였다는 사실. 요즘은 스마트 폰 덕에 불편이 많이 줄었지만, 정류장 노선도가 더 익숙한 노년층에게는 이 씨의 화살표가 큰 도움이 된다.

스티커를 붙이고 있으면, 사람들이 가끔 ‘뭐 하시는 거예요?’라고 물어봐요. 고맙다고 말하거나 공감하는 분들이 많죠. 가끔 사탕이나 빵, 귤, 음료수 등을 챙겨주시는 분들도 있어요.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인데도, 저를 좋아하고 제게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면 참 좋아요.

이 씨가 들인 스티커 초기 비용은 단돈 8백 원. 문방구에서 파는 8백 원짜리 스티커 한 묶음에는 5백2십개의 스티커가 들어 있다. 그는 현재 서울 시내버스 정류장 6천4백여 곳 중 3천5백여 곳을 이 빨간 화살표로 채웠다. 주로 밤에 자전거를 타고 운동하면서 스티커를 붙인 결과다. 표시 작업을 위해 최근엔 접착력이 뛰어난 스티커를 특별 주문 제작했다.

평소에는 하루 7~8시간이 걸려요. 날 잡아서 하는 날에는 15시간 정도 걸리고요. 갔다가 돌아오는 시간을 포함하다 보니, 그 정도 되네요.


그의 스티커 작업은 2011년 여름부터였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때는 2011년 11월이다. 서울시에서 이전부터 방향표시 작업을 하고 있었지만, 2004년 버스노선 개편 이후에는 일이 거의 중지된 상태였다. 처음에는 그도 그저 불편함을 느끼는 시민 중 한 명이었기에, 시청 해당 부서에 민원을 넣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민원처리 기간만 28일이 걸렸고, 신고된 일부 정류장만 처리되었다.

고로 직접 붙이는 게 낫겠다 싶어 실천에 옮기려고 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질 않았다. 주변에 함께 하자고 제안했지만, 돕겠다는 이는 없었다. 친구들은 “‘알바비’ 받는 것도 아니고, 봉사점수를 받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그 필요성에 대해서는 다들 공감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자전거를 타며 운동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가볍게 혼자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람들이 많으면 붙이기가 번거로워서, 밤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고, 창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민의 격려와 관심 덕분에, 그는 자신감을 얻었다. 마포구에서 시작한 일은 서울시 중심가로 확대됐고, 현재는 서울 버스 정류장의 절반에 그의 화살표가 붙어 있다. 이 모든 일을 한 것은 버스회사 직원도, 서울시청 공무원도 아닌 평범한 20대 대학생 혼자였다.

스티커 한 조각의 나비효과


그러던 어느 날, 박원순 서울시장의 트위터에 그의 이야기가 올라왔다. 이민호 씨를 묵묵히 바라보던 한 시민이 그의 사연을 올린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인터넷에서 끊임없이 리트윗되었고, 그에게는 ‘화살표 청년’이라는 이름이 새로 붙여졌다.

그의 활동이 매스컴을 타고 주목을 받으면서, 비슷한 생각과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주변에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스티커를 제작해준 학생들도 있었고, 성남시 마을버스 노선도를 만드는 청년도 동참해 빠진 곳을 함께 채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방향 표시의 문제점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저 혼자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참여해서 사회가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물론 아직 눈에 띌 정도의 큰 변화는 없다. 하지만 그는 박 시장을 만날 수 있었고, 그에게 여태 활동한 것을 기반으로 정책 제안을 할 수 있었다. 또한, 관련 조례(서울특별시 조례 제5319호)가 개정, 신설되었고, 버스운송사업조합에서 작년 10월부터 전체 노선을 관리하게 됐다. 내년 하반기에는 전반적인 교정과 디자인 개편이 이뤄질 예정이다.

이기적으로 살고 싶진 않아요


그러나 여전히 문제점은 남아있다. 정류장에 다니지 않는 버스가 버젓이 적혀 있는가 하면, 적혀 있지 않은 버스가 정차하기도 한다. 버스 노선도가 찢겨 파손되기도 하고, 정류장 기둥은 불법 광고물로 도배되어 있으며, 정류장 벤치는 쓰레기로 뒤덮여 있다.

서울 외 지역은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약식으로 노선도가 표시된 것이 대다수이며, 사람들은 배차 시간표가 없어서 버스가 언제 오는지 하염없이 정류장에서 기다릴 뿐이다. A 도시에서 B 도시로 가는 광역버스 역시 업무 분담이 명확하지 않아, 상대 도시에 서로 일을 미루고 있다.

요즘 그는 자전거 전국 일주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국토 대장정’과 같은 29박 30일 자전거 전국 일주 프로그램을 기획해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독려하기 위함이다. 팀별로 버스정류장을 따라 전국을 여행하며 빠진 노선도와 표시 작업 진행을 확대해 나가고,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영문 전국 버스 노선도도 계획 중이다. 24인용 텐트 치기로 유명한 Lv.7 벌레 이광낙 씨, 대학생 시인 이서령 씨,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를 석권한 장순규 씨(대학생 그래픽 디자이너) 등 젊은 20대들이 참여의 뜻을 내비쳤다.

저 혼자만 생각하면 이 정도밖에 아이디어가 안 나오는데, 다른 분들도 참여하면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 같아요. 장학금, 후원금 등으로 기본적인 것들은 제가 할 생각이에요. 그런데 노선도를 제작하는 비용이 만만치가 않아서 기업들의 후원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봉사단, 제작 등의 참여도 괜찮고요


이 일을 언제까지 할 거냐는 질문에, 그는 “사실 부모님도 요새는 그만하라고 한다.”라며 웃었다. 취업 준비생인 그 역시도 취업 때문에 걱정이 많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멀었다.”라고 대답했다.

사실 일주일이면 다 붙일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가다 보면 로터리, 사잇길 등 계속 나오더라고요. 금방 붙일 줄 알았는데, 아직도 멀었어요.(웃음) 취업하고 나서도 자전거 타는 것은 계속할 수 있는 거잖아요. 어떤 지역이 됐든지 문제가 되면 계속할 생각입니다.

표시 작업은 그가 사는 마포구와 서울시 중심가 중심으로 이뤄졌기에, 아직도 서울시 외곽지역은 미미한 상태다. 기자가 돕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자, 그는 흔쾌히 주머니 속에서 자신의 스티커를 나눠 건넸다. 인터뷰가 끝나고 그는 자전거를 끌고 강남역 인파 속에서 또다시 스티커를 붙이러 유유히 사라졌다. ‘이기적으로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던 그의 뒷모습은 <꽃보다 남자> 구준표보다 더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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