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준상 l 반복 속 담담한 버팀

글은 쓰려고 해도 써지는 게 아니고
마음은 잡으려고 해도 잡히는 게 아니고
그저 보이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움직여 보리라!

수필 같은 영화
난 그 수필 안의 글이 되어
채워진 세상을 버리고 있다.

– 영화 <하하하> 트레일러 중


서글서글한 눈매와 유쾌한 성격이 매력적인, 벌써 마흔을 훌쩍 넘은 중견배우 유준상. 그는 생각 이상 단단했다. 그 자세와 눈빛은 단정해 상대의 옷매무새마저 정리하게 할 정도였다.
배우 유준상은 ‘끈덕지게 버텨내겠다.’라고 다짐했다. 그는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라 했다.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으로 수려한 예술 연기와 관객의 호응을 한번에 거머쥔 이 아트버스터ArtBuster는 젊은 날을 흑백 영화처럼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끈질기게, 오래’ 20대의 단초

연극영화과 출신인 그는 젊었을 때부터 연극판에 목숨을 바쳤다. 밤샘과 늦은 귀가는 그의 일상다반사였다.

에너지 넘쳤죠.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요. 절제가 안된 시기라고 하면 맞는 표현일 듯한데, 미친 듯이 대사도 외우고 반복해서 연습하며 연기에 푹 빠져서 살았어요. 좋아해서 시작한 연기인데 대학에 가보니 저 정도 되는 친구들이 많더라고요. 그중에 두각을 나타내려면 더 열심히 해야 했죠.


연습을 마치고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갈 때면, 그는 앞으로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어떤 배우, 어떤 연기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오래전부터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결국 그는 특출나게 잘생기지 않은 외모에 톱배우를 꿈꾸기보다는 ‘끈질기게 오래 버티는 배우’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루하루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죠, 배우로서. 버틴다는 것이 그냥 정체된 상태에서 자리만 계속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노래나 연기, 체력 등 모든 면에서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보였을 때, 저를 지켜보는 분들이 “저 친구는 3년 사이에 저렇게 늘었네?”라면서 계속 기대하게 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기록과 공부는 멈출 줄 모른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배우 일지를 썼다. 연기에 대한 생각, 촬영지나 날씨에 대한 감상 등을 꾸준히 적었고, 연간 1권 이상의 결과물이 쌓여 지금은 20권 이상 그의 역사책이 있다. 몸으로 기록하는 배우가 끊임없이 글쓰기에 열심인 이유는, 젊은 시절 한 교수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지금은 정년퇴임 하신 동국대 연극영화과 안민수 교수님께 가르침을 많이 받았어요. 선생님께서 “기록하는 게 다 남는 거다. 지금부터 하루에 조금씩이라도 기록해라.”라고 하신 게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습관화되어 버린 거죠. 쓰면서 느끼는 게 많고, 쓸수록 글 재주가 늘어난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개인적으로 여행하거나 칸 같은 곳에 초청받아서 갈 때도 줄곧 적고 또 적게 됐어요. 전에 적었던 것을 읽어보면, 그때 생각했던 것을 어떻게 표현하려고 했는지 고민하는 계기도 되고요. 여러모로 도움이 됩니다.

한 인터뷰에서 퇴임한 안민수 교수는 “유준상은 동국대에서 노력하기로는 챔피언이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는 패기 넘쳤던 20대에 썼던 글들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라는 놀라움과 ‘이 시절에도 이런 고민을 했었네.’라는 공감이 교차한다. 그리고 지금 그때 썼던 글처럼 오랫동안 청년의 기질이 살아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 했다.

내년에 개봉하는 <다른 나라에서>의 촬영을 예순이 넘은 이자르 위페르라는 프랑스 배우와 함께 찍었습니다. 그 나이에도 정정하고 감정 표현도 자유롭더군요. 나이가 들어서도 꼿꼿한, 소녀의 감성을 지닌 여배우의 자세를 보고 참 인상 깊었죠. ‘아, 나도 저 나이에 멋진 배우가 되고 싶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요즘도 매일 몸도 목도 풀고 부족하면 레슨도 받습니다. 시간이나 장소도 안 가리고요.

그의 이런 노력은 다양한 무대에서 큰 힘으로 뒷받침됐다. 이를테면 내공이 쌓여 쉽게 무너지지 않는 무림의 고수 같은, 어느 장면에도 적합한 배우로 성장한 것이다.

처음에는 물론 많이 부족했죠.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 떨릴 때가 있었으니깐요. 그런데 많이 연습하고 이미지 트레이닝하다보니 카메라가 무대 같고 무대가 내가 되는, 그러니까 아예 (카메라의) 존재 자체를 잊게 되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그때부터는 감정표현에 몰입했죠. 뒷모습이나 어깨 들썩거림만으로도, 그 상황과 감정을 보는 분들에게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이런 순간이 지나고 그를 더욱 단련시켰던 것은 드라마에서였다. 연극이나 뮤지컬처럼 같은 장과 막을 매회 반복하는 공연과 달리 드라마의 새로운 도전 과제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 상황이 다르고 장면마다 새로운 감정을 펼쳐야 하잖아요. 또 매일 찍는 무대(촬영장)가 바뀌니까 이에 대한 대처방법을 배우게 됐죠. 저로서는 정말 좋은 기회였습니다. <토지>, <어사 박문수>, <강남엄마 따라잡기> 등을 찍으면서 익힌 상황판단 능력이나 대처 능력이 다시 공연 무대에서 도움이 됐으니까요. ‘어떤 씬을 연습해보자.’, ‘어떤 장면을 맞춰보자.’ 하면 바로바로 감정을 잡고 상황에 뛰어들게 됐죠.

이리 보면, 그가 홍상수 감독의 새로운 페르소나로 각광받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별도의 각본 없이 배우를 섭외하고, 촬영 당일이 되어서야 A4용지 1~2장의 쪽대본을 주며 2~30분 후에 바로 큐사인을 주는 급박한 환경에서 그의 연기는 최적화될 수밖에 없다.

반복 가운데 버텨라, 버틸 것이다


최근 앙코르공연 중인 <삼총사> 때문에 그는 운동도 잘 안하고 노래도 많이 안한다. 혼자 하는 연습도 상황을 봐가면서 한다.

운동하다가 다치면 큰일이잖아요. 그 역할은 제가 해야 하니까. 그래서 더 몸을 사리는 것 같고요. 노래 연습은 워낙 좋아하는데 성대결절이 날 뻔했어요. 그래서 좀 자제하죠. 무대에서 관객과 직접 만나는 약속을 한 건데, 컨디션을 유지해야 해요.

드라마든 영화든 뮤지컬이든 맡은 바 역할에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덤덤하게 말하는 그는 일상의 배우가 되어 자신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배우도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일상을 살잖아요. 그 중간에 작품들로 사람들과 만나는 거고요. 생각보다 반복적인 삶입니다. 대본 읽고, 촬영하고, 다시 무대 인사 다니고. 그렇게 30년, 40년씩 버티는 것 같아요. 그렇게 버텨나가는 생을 만들고 채워가는 것 아닐까요?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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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열심히 버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유배우님! 황기자님 :-)
  • 최지원

    제목이 유준상씨를 정말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반복 속 담담한 버팀이라!
    정말이지 게으른 저에겐 좋은 자극이 되는 기사였습니다:)
  • 글은 쓰려고 해도 써지는 게 아니고
    마음은 잡으려고 해도 잡히는 게 아니고
    그저 보이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움직여 보리라!

    수필 같은 영화
    난 그 수필 안의 글이 되어
    채워진 세상을 버리고 있다.
    ...와 이거 너무 좋아요 ㅠㅠ영화도 찾아서 봐야겠어요
    기록하는 습관..! 정말 중요한것같아요
    정말 그때의 노력과 열정때문에 지금의 유준상씨가 계신것같아요
    저도 정말 하고싶은일 하면서 살아야겟어용 ㅎㅎㅎ 하단에 싸인... 개인소장할게요!!!!!!!히히 팬이거든요
  • 배우 유준상씨를 보면 참 진솔하다 라는 생각이 들곤 했었어요.
    끈덕지게 버텨내겠다
    네, 저도 끈덕지게 버텨내겠습니다!
  • 유준상 넘좋아요ㅠㅠㅠㅠ유준상 이름 보고 반가웠음ㅠㅠㅋㅋ멋진분이셨넹!!!!!ㅜㅁㅜ
  • Wow! 오잉? 웬 영어? ^^ 럽젠 오랜만에 들어왔는데 좋아하는 배우의 인터뷰를 여기서 보니, 기분 색다르네요^^ 인터뷰를 정말 폭 넓게 하시는듯^^ 기사 잘 읽고 갑니다.
  • 무기력한 제 자신을 뒤돌아 보게 하는 글이네요 평소에도 유준상씨 훌륭하다고 생각했는데 배울점이 더 많아지네요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
  • 뮤지컬 삼총사.. 정말 좋은 자리에서 보게 돼서 아주 가까이서 유준상님 연기를 보고 온 적이 있어요!! ^^
    객석을 향해 보내던 그 뜨거운 이글아이(!)가 잊혀지지 않네요.ㅎㅎ 히히. 어찌나 멋있으시던지!

    습관처럼 '기록'하신다는 인터뷰 내용을 보니, 괜스레 더 반갑기도 하네요.
    기사 잘 보고 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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