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익ㅣ이중생활의 강력한 몰입

나른한 오후 정신없이 몰아치는 무기력을 한번에 없애 줄 즐거움의 진리, <두시탈출 컬투쇼>! 부동의 청취율 1위 자리를 지키는 컬투쇼의 진두지휘자, 이재익 PD의 삶은 좀 특별하다. 오전엔 방송국에 출근하여 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퇴근 후엔 소설과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독특한 이중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7년, 월간 문학사상 소설 부문에서 23세에 등단한 그는 현재까지 13편의 책을 출간했고, 올겨울을 훈훈하게 달군 영화 <원더풀 라디오>를 포함한 총 3편의 시나리오가 영화화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를 수식하는 단어는 베스트 소설 작가, 시나리오 작가, 인기 절정 프로그램의 라디오 PD로, 무엇 하나로 정의내릴 수 없지만 각각에 대한 몰입도는 뜨거워 데일 정도다. 이로 미루어 봤을 때 그는 ABBA의 노래 [The Winner takes it all]의 주인공이 아닐까? 하지만, 이 모든 영광에는 명확한 20대의 뿌리가 있었다.

따돌림, 우등생, 정학, 회장… ‘노력’을 깨달은 청춘 앓이

‘공부’의 목적은 무엇일까? 수많은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그에게는 단순했다. ‘따돌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서울의 야경과 에스컬레이터, 밀크 셰이크에 반해 부모님을 몇 년간 졸라 울진에서 상경했다. 당시 촌놈 냄새가 풀풀 풍기는 그의 모습은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하기 십상이었고, 특히 여학생들은 그와 짝이 되면 울음을 터뜨렸다. ‘따돌림’의 아찔한 경험 때문에 눈물로 지새운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그는 비관과 좌절보다는 해결책을 찾았다.

“따돌림을 벗어나기 위해 공부를 진짜 열심히 했어요. 공부를 잘하는 친구가 인기가 많더군요. 특히 영어를 열심히 했는데, 직육면체 방 안을 바닥만 빼고 온통 전지로 도배해서 영어 단어를 쓰고 닥치는 대로 외웠죠. 이 와중에 유일한 친구는 라디오 음악이었어요. 특히 메탈리카(Metallica)와 데프 레파드(Def Leppard), 아이언 메이드(Iron Maiden)는 제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청량제였죠“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미친 듯이 뛰어든 공부의 효과는 그를 중학교 때 전교에서 손꼽히는 등수 안에 들게 하고 전교 회장에 당선되는 영예를 안긴 것은 물론, 옆 학교의 여학생들과 떡볶이를 함께 먹는 영광까지 안겼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지만, 고등학생이 되어 한없이 거만해진 청춘의 객기는 도를 넘고 말았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 술을 마신 사건으로 정학을 맞게 된 것.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매를 맞았다. 그런 와중에 철없던 자신을 반성했다. 자신을 위해 희생한 부모님을 떠올린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께서 하시는 봉천동 약국을 간 적이 있어요. 당시 봉천동은 달동네로, 서울에서 제일 어렵게 사는 동네 중 하나였죠. 약국 의자에 앉아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고 있는데, 마을 주민이 박카스를 하나 달라고 하더니 받자마자 전력을 다해 도망치는 거예요. 그때 너무 놀라 ‘어어…’ 하면서 따라가지 못했는데, 아버지는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으시며 대수롭지 않은 듯 체념하셨죠. 매를 맞던 중 그 장면이 떠오르면서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자식이 원하는 삶을 위해 고향을 떠났고 아무 말 없이 열심히 일하신 아버지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도록, 그는 다시 마음의 끈을 조여 맸다. 부들부들 몸을 떨며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공부하다가 울어본 적 있어요? 잠은 오고 10시간 넘게 문제를 풀었지만 풀어야 할 문제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을 때 나오는 눈물이요. 이런 극적인 체험을 통해 냉정하기도 한 자본주의 경쟁 법칙을 깨달을 것 같아요. 그리고 글을 쓸 때 보통 9~10시간 쭉 작업하는 독한 근성이 필요한데, 당시의 경험이 도움된 것 같고요. 이런 삶을 권하고 싶진 않지만, 강렬하게 원하는 대상이 있다면 남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은 자명해요.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사회를 탓하거나 기성세대를 비판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고 정말 어리석은 짓이죠.”

이런 그의 확고한 의지는 앞에 닥친 입시의 문제를 이겨냈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냉혹한 현실도 깨닫게 했다.

 
실패의 고배 후 천생의 라디오 PD

대학생이 되자, 그는 뭔가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단 그 무엇은 동아리, 세미나와 같이 대학생의 패기가 깃든 활동이 아닌 하루빨리 사회로 나가 자기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 그의 꿈은 초등학교 때부터 장래 희망란에 써왔듯 줄곧 ‘작가’였다. 그는 제도권 교육 안에서 잠시 숨겨둔 발톱을 서서히 세우며 하루빨리 등단하여 사회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18세에 등단한 최인호 작가님이 저의 롤모델이었죠. 수많은 소설을 쓰셨고 그것이 영화화된 작품도 많아요. 그분의 삶을 동경하며 하루빨리 등단해야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많이 읽고 습작해보길 반복하던 중, 카투사로 군 복무를 하게 된 것은 글을 쓰는데 좋은 조건이 되었다. 다른 병사와 간섭이 적은 2인 1실 생활관과 취침 전까지 허락된 5~6시간의 자유시간 동안 그는 작품구상을 하고 글을 썼다. 그러던 중, 여자친구 생일 선물로 써 준 <질주, 질주, 질주>란 작품이 ‘월간 문학사상 신인상’이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그 소설은 영화 <질주>로 제작되는 계약까지 성사했다. 그의 나이 23세, 제도권 교육에서 얻을 수 있던 결과물이 아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서 얻은 최초의 성취였다.

그의 첫 소설 <질주 질주 질주>(왼쪽), 이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질주>(오른쪽). 세기말을 살아가는 청춘의 삶과 사랑, 고통과 저항의 모습을 잘 표현된 작품이다.

 

23세의 등단과 영화 계약까지! 이 사실만으로도 그가 영화계에서 충분히 대우를 받을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질주>라는 영화를 하던 중 영화사 경리보다 어렸던 나이 때문에 영화 관계자에게 담배 심부름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고 영화감독의 집에서 한 달 넘게 투숙하면서 청소와 빨래를 도맡았던 일도 있었다. 이후, 충무로에서 1년 반 동안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글을 쓰는 근성, 속필 능력, 주문에 따라 탈 장르를 써야 한다는 점 등 시나리오 작가를 하면서 도움이 되는 부분도 분명 있었죠. 하지만, 당시 영화산업이 굉장히 허술하고 불공정한 체계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보았어요. 글만 쓰고 살면 좋은 집과 좋은 차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는데, 할 수 있겠느냐고요. 대답은 ‘아니요.’였어요. 제 욕망을 감추고 살면 스스로 싸우며 살게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처우가 좋은 직장을 따로 찾게 되었죠.”

또 다른 직업을 찾는 그의 행보는 녹록지 않았다. 팝 음악 애호가인데다가 대학 시절 밴드 활동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음반 회사에 취직했지만, 그는 조직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몇 개월도 안 되어 그만두게 되었다. 글과 관련된 일인 광고 카피라이터에도 도전해보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계속되는 실패로 사회 부적응자가 된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 그는 매일 술로 달래며 점점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가 마지막 카드라고 생각한 직업은 바로 라디오 PD. 삼고초려의 마음으로 그는 라디오 PD에 도전했다.

 

“라디오 PD의 자유가 매우 좋았어요. 내 프로그램을 잘 만드는 한, 다른 회사와 달리 상대적으로
원하는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요. 또 음악을 정말 좋아했기 때문에 라디오 PD는 ‘나와 잘 맞을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죠”

여러 심사과정을 거쳐, 마지막 합숙 평가를 받은 그에게 인사팀은 제안했다. 합숙 평가 결과, 예능 PD가 더 맞을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그의 OK 사인만 있으면 바로 입사가 되는 상황, 이를 선택하지 않으면 영영 기회를 놓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한 그의 선택은 라디오 PD였다. 그 후 인사팀으로부터 1달간 연락이 없어 ‘아 예능으로 갈 걸 그랬나.’란 후회가 스멀스멀 올라오던 찰나, 올곧은 의지의 승리일까? 라디오 PD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글장이의 인생 4막을 향해 자신을 쏘다

불과 몇 달 안에 그만두었던 기존 직장과 달리, 라디오 PD는 그에게 딱 맞는 직업이었다. 현재 10년이 넘도록 글쓰기와 병행할 수 있는 직업인데다가 무엇보다 그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라디오를 통해서 너무 많은 행복과 위안을 받아요. 이 아름답고 인간적인 곳에서 2시간 동안 좋은 음악과 함께 많은 사람과 나눌 수 있으니까요. 이런 일을 하는 전 정말 행복해요.”

 

이번 겨울을 훈훈하게 달군 <원더풀 라디오>도 이 아름다운 공간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인간애에 주목한다. 작품의 감동을 배가시키는 라디오 사연들 역시 90% 이상 실제 사연을 조금 각색해 쓴 것이다.

 

무엇을 만든다는 광의의 개념으로 본다면 소설, 시나리오 작가와 라디오 PD의 일은 언뜻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성질은 천지 차이였다.

“라디오 PD는 명백히 지휘자이면서 조력자예요. 물론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아이디어를 짜는 일엔 모두 관여하지만 내가 무엇을 하기보다는 사람들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일을 하죠. 진행은 DJ, 원고는 작가, 송출과 음향은 방송 엔지니어가 맡거든요. PD는 이들 사이의 ‘추’가 되어 힘의 관계를 조정해주는 거예요. 반면에 PD와 정반대로 작가는 모든 일을 혼자 고민하고 고독한 방에 혼자 앉아 작업하죠.(웃음)

그는 가끔 복잡다단한 방송가 사람 사이의 관계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다. 하지만, 그것도 퇴근 후 독방에 앉아 글 쓰는 것으로 해소되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 행복한 작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그는 2011년도 한 해에만 장편소설, 에세이를 포함해 총 8권의 책을 쓰며 왕성한 필력을 보여줬다. 그가 이런 결과를 낼 수 있었던 원천은 무엇일까?

“풀 타임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라디오 PD 일을 하며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어요. 이제 13년 정도 했는데, 쓴 것 중에 영화화되지 않은 것을 모아 다시 완성도 있게 소설로 낸 작품이 많아요. 지금까지 시나리오를 30편은 쓴 것 같은데, 영화화한 것이 3편이니깐 아직 이야기가 꽤 남았네요.(웃음)”

 

‘금 나와라, 뚝딱!’이 아닌 10년이 넘는 꾸준한 집필로 준비된 이야기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터, 준비된 이야기를 한 번 더 고쳐 완성도를 한층 끌어올린 그의 글은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매력이 있다. 바로 책을 덮을 수 없게 하는, 이야기의 강력한 몰입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불순물 없는 ‘이재익표’ 문체는 감탄의 대명사다.

“다른 소설가들이 60km로 정속 주행한다면, 저는 시속 100Km로 달리고 싶었어요. 뒤의 이야기가 궁금해 책장을 빨리 넘기게 하는 것은 저만의 차별화라고 할 수 있죠. 영상세대라 할 수 있는 대학생이 소설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진입 장벽을 낮추려고 한 점도 있어요. 기본적으로 저에게 책은 ‘재미와 오락’으로써의 가치가 우선이고요. 거기에 교훈과 깨달음, 각성, 문학과 예술성이 있다면 더없이 좋겠죠.”

이재익 작가의 작품들(왼쪽, 사진제공: 이재익)과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 소설 <아이린>(오른쪽, 출처 : 황소북스)

 

“제가 제일 애착이 가는 작품은 ‘아이린’이에요. 1992년 윤금이 사건을 소재로 했고 제 작품 중 가장 잘 썼고 오래 썼어요. 아직도 개선되지 않는 SOFA 협약과 관련된, 날 선 주제의식과 제 군 생활의 실제 경험이 녹아있는 작품이기에 더욱 애착이 가요”

이재익 PD는 자신의 인생을 전체 5막이라 한다면, 현재 도약기인 2막을 끝냈다고 밝혔다. 더불어 20대 시절, 사회생활에 대한 갈망 때문에 대학생만의 패기 넘치는 활동이나 동아리 선배 사이의 로맨스, 학교 친구와의 추억 등이 없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인생 자체가 골고루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흐른 것을 아쉬워하며, 그는 학교와 사회의 적절한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귀띔도 잊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가 인생의 4막쯤 자신이 그리는 상은 어떨까? 그는 대가가 되어 ‘이재익’이란 이름만 들어도 모든 작품이 설명되는 경지에 오르고 싶다고 했다. 한국의 ‘스티븐 킹’, ‘히가시노 게이고’를 꿈꾸는 것이다. ‘코맥 메카시’의 <더 로드The Road>와 같은, 우리 세계의 끝이 담겨 있는 묵시록적 소설을 쓰고 싶다는 이재익 PD. 그의 즐겁고 치열한 행보에 벌써 어깨가 들썩이게 된다

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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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만 더 뜨겁게~ 가슴 깊이 담아두고 갑니다.
  • 이윤애

    컬투쇼 PD님! 굉장히 잘생기셨어요 !!! 세심하게 신경쓰시면서 쓰신게 눈에 보여요~ 멋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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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정식 기자

    윤애 기자님, 재익 작가님 마음에 드시나요? ㅋㅋㅋ 그럼 작가의 작품을 한번 쭉 흝어보시길... 윤애 기자님 속독의 대가로 알고 있는데, 아마 재익 작가님의 책은 1시간도 안 걸릴 듯 합니다 !!

  • 엄PD

    @ 이소연 기자 저도 이재익 작가님의 5막이 정말로 기대됩니다. 옆에서 쭉 주시하고 있어야 겠어요^^
  • 이소연

    엄정식 기자님이 그렇게나 인터뷰하고 싶어했던 이재익PD기사가 드디어 올라왔군요! 기사 재밌게 잘 읽었어요~ 이재익PD의 5막 정말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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