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살기의 민낯 – 2탄 제주에서 박지원

내 집이 아닌 타지에서 ‘한 달’이란 시간을 허하는 것. 그곳에서 투명하게 나를 마주하는 것. 일생에서 어찌 보면 이 짧은 기간을, 모두 방점으로 기억했다.

기획 1_ 발리에서 김정영 | “미뤄둔 행복을 ‘지금’으로 당겨와 보길.”
기획 2_ 제주에서 박지원 | “언제든 돌아와도 좋으니까.”
기획 3_ 포르투에서 김가람 | “어쩌면 발견하지 못했을 순간들이 있어요.”
기획 4_ 치앙마이에서 신혜원 | “또 다른 도전에 덜 망설여져요.”

박지원의 한 달 살기
MAJOR_ 동국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PLACE_ 한국 제주도(세화리)
TIME_ 2018년 7월 9일~ 2018년 8월 6일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제 고향은 제주였으면 했어요. 예전 가족들과 함께 제주에 갔을 때 편안하고 좋은 기억이 제 안에 남아 있었나 봐요. 고향은 돌아가고 싶은 곳이잖아요. 한국이면서 한국 같지 않은 그곳으로, 제가 지칠 때면 언제든 돌아가 쉴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죠.

인플루언서를 통해 한 달 살기를 알기 시작했어요 스무살이 된 후였죠.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는데, 한 달 살기를 했던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강한 열망으로 바뀌었어요. 열망은 곧 실천으로 바뀌었죠. 휴학 후 제주에서의 한 달 살기를 준비했습니다. 생각보다 지내는 방법이 다양하더라고요. 그중 전 게스트하우스에서 청소와 요리 등을 돕는 스태프로 일하면서 숙식을 제공받기로 했어요. 보통 한 달 중 10일 혹은 15일을 근무하는 형태로 계약해요. 여행 여비를 제공해주는 곳도 있죠.

그나저나 어디서 살지? 제주는 크게 동쪽과 서쪽 게스트하우스로 나뉘어요. 대부분 관광객은 서쪽 숙소를 지향하는 편이죠. 일찍이 관광 개발이 되어 여러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거든요. 게스트하우스는 파티도 자주 열어 스태프도 손님의 안전을 위해 파티에 참석하죠. 그에 비해 동쪽은 조용한 편이에요. 저의 한 달 살기 취지는 따뜻하고 여유로운 고향의 느낌이었기에, 동쪽을 선택했어요.


그림자보다 더 많이 함께했던 카메라와 노트. 거짓말 조금 보탰다.

자기소개서는 미리 써 두기 게스트하우스 대부분 급하게 모집하는 경우가 많아서요. 매일 네이버 카페(제주도 게스트하우스 여행자 모임 ‘니 잘못이 아니야’)에서 모집 공고를 확인했죠. 자기소개서는 늘 준비된 상태였어요. 결국, 제주의 동쪽에 있는 구좌읍 세화리의 작은 게스트하우스로 가게 되었어요. 혹시 몰라서 짐을 잔뜩 챙겼습니다. 곧 후회했어요. 대부분 입지도, 사용하지도 못했죠. 필요한 게 있으면 택배로 받아도 되는 건데 말이에요. 무거운 트렁크를 낑낑 옮기면서, 제주살이의 막이 올랐습니다.


태풍 때문에 연착된 제주도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출발부터 영 불안한데∙∙∙.

고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태풍의 첫날 공항에 내리니,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었어요. 남쪽에서 태풍이 온다는 소식이 들려올 무렵이죠. 도착하자마자 제가 상상한 첫날과는 퍽 멀었어요. 비를 피하려고 카페에 들어가 앱으로 버스노선을 확인했는데, 몇 시간이 지나도 버스가 안 왔어요. 알고 보니, 버스 시간표가 따로 있더라고요. 겨우 버스를 탔는데 기사님 왈, “그런 캐리어를 들고 타면 버스 다 망가져!” 정말 집에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었어요. 가까스로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 사장님 부부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앉아서 3시간, 여 사장님과 대화를 나눴지 뭐예요. 남 사장님의 “내일 얘기는 내일 해.”란 말에, 겨우 매듭지어졌죠. 첫날은 너무 긴장되고 무서웠어요. ‘내가 잘할 수 있을까?’란 걱정 아래 잠을 청했죠.


카페에서 허탕 친 나의 시간은 안녕. 제주도 버스는 따로 시간표를 확인하는 게 좋다.

어서 와, 혼자는 처음이지? 무언가 혼자 하는 것은 처음이었어요. 가끔 ‘혼밥’은 했었어도 혼자 있어 본 적도 많지 않고, 혼자 여행하는 것도 처음이었죠. 그래서 더 떨렸어요. 게스트하우스에서의 첫날은 정말 정신이 없었답니다. 교육을 받는 것만으로도 바빴는데, 입∙퇴실하는 사람이 많아 일이 많았거든요. 앞으로도 이런 날이 계속되면 게스트하우스에 꼼짝없이 갇히겠단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제가 제주에 머무는 동안 이렇게 바쁜 날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웃음) 사장님 부부가 인심이 좋아 꼼꼼히 신경 써 주셨죠. 보통 일과는 기상해서 달걀 요리나 토스트, 수프 등을 테이블에 챙기는 거로 시작해요. 오전 9시부터 퇴실한 손님방을 비롯해 게스트하우스를 구석구석 청소하면 늦어도 오전 11시 30분에는 일을 마치죠.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는 오후 4시까진 자유 시간이에요. 손님 입실을 돕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죠. 금세 일은 수월해졌어요.

일이 없을 때마다 한 모든 것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아졌어요. 저도 몰랐던 제 모습이었죠. 특히 혼자 카페에서 있는 시간이 참 좋았어요. 제주도에는 예쁜 카페들이 많거든요. 게스트하우스 바로 앞에 있는 세화 해수욕장에서의 수영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였죠. 세화 해수욕장은 사람도 많지 않고 작아서 마치 프라이빗 해변 같았어요. 바다에서 나와 신선한 바람과 햇빛에 몸이 마를 때의 기분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죠. 모든 시간이 여유롭고 나를 위한 순간이었어요. 인천에 있을 땐 아무것도 안하고 하루를 보내면 왠지 불안하고 아깝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제주에선 온종일 게스트하우스에 늘어져 뒹굴어도 충만한 기분이 들었죠.


내가 바로 요리사! 김치전부터 붕어빵까지, 매일 저녁이 즐거웠던 게스트하우스의 삶 일부.

인천의 박지원 vs 제주의 박지원은? 한 달 살기의 가장 큰 의미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시간을 준다는
점이에요. 인천에 있던 저와 제주에 있는 저는 같은 사람이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죠. 공간이 분리되면서 제 삶도 분리되고, 그 가운데 진정한 자신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경험하면서 더 명료하게요. 절 모르는 사람과 함께한 것도 한몫을 했어요. 누군가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됐으니까요. 온전히 ‘박지원’에게 집중한 시간이었죠.


휴식 시간이나 휴무일이 있을 때마다 동네를 어슬렁거리거나 멀리 여행을 떠나거나. 세화리엔 숨은 예쁜 곳이 많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던 첫 기억 제주에서 생활한 지 보름째, 엄마와 1박 2일 함께했어요. 아쉬운 시간을 뒤로하고 저녁에 공항까지 배웅하고 방에 들어왔는데, 기분이 너무 헛헛하고 공허했어요.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죠. 전 생각보다 외로움을 잘 타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어요. 나를 더 잘 알았으니, 게스트하우스에서 한 달 살기를 감행한 건 잘한 선택이었죠.


세화리 카페 <한라산>의 명물, 맛있는 당근 케이크. 가기 전에 문을 열었는지 꼭 확인하세요!

제주의 밤은 너무 짧다 밤이 되면 이곳 거리는 깜깜해요. 인천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주변 가게가 일찍 문을 닫아 밤에는 뭔가 할 수 없어요. 먹고 싶은 것이 갑자기 생겨도, 필요한 것이 번뜩 생각나도 내일 아침으로 미뤄야 하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누리는 밤과 새벽의 서비스는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처음엔 조금 불편했지만, 나쁘지는 않았어요. 미리 준비하면 되니까요.

세화리 여행의 준비 자세는 낮이라도 SNS나 전화로 영업 여부를 확인하고 가세요. 세화리에는 사계절 방학을 하는 가게가 많거든요. 전날 매출이 너무 높아 다음날 장사를 접는 경우도 있고요. 이런 색다름이 세화의 소소한 매력에 더 빠지게 된 계기였죠. 우도와 비자림은 꼭 방문해 보길. 세화 해수욕장과 더불어 제주에서 제가 꼽는 가장 아름다운 곳이에요.


우도에서의 전기 자전거. 작은 섬을 자전거로 누비는 기분은 직접 경험해봐야만 알 수 있죠

D+30, 집에 잠시 다녀올까? 한 달이 제겐 충분한 시간이었어요. 집에 있는 가족도, 강아지도, 친구도 보고 싶었거든요. 가보지 못한 곳도 해보지 못한 것도 많았지만, 별로 아쉽지 않았어요. 조만간 다시 돌아올 거니까, 이제 제주도는 제 고향이니까요. 다만, 지금은 갈 때란 생각이 들었을 뿐이죠. 집에 와도 여전히 꿈을 꾸는 기분이었죠. 그 꿈을 딱 깬 순간은 지하철을 탔을 때예요. 매캐한 공기와 수많은 사람, 생기 없는 공간, 그리고 칙칙한 색깔까지∙∙∙ 나 돌아왔다! 무엇보다 바다가 보고 싶었어요. 세화 해수욕장에서의 금쪽같던 그 기억이 떠올랐죠. 괜찮아요. 언젠가 다시 한 달을 살러 돌아갈 거니까요.

불안과 안정은 한 끗 차일까? 한 달 살기 후 세상은 그리 달라져 있지 않더라고요. 제가 뒤처졌단 생각도, 불안한 마음도 없었죠. 오히려 안정을 찾았어요. 시간에 대한 관념이 달라졌다고 할까? 당장 앞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더 멀리 보게 되었어요.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필요한 게 무엇인지 고민하며 저를 더 잘 알게 되었죠. 무엇보다 한 달 살기를 하고 나서 부지런해졌어요. 물론 이건 게스트하우스 스태프 생활의 힘이겠죠?(웃음) 조만간 한 달 살기를 다시 할 계획이에요. 제주도도 좋지만, 국외에서 도전하는 것도 좋겠죠. 언어의 장벽을 깨고 싶거든요. 치앙마이에 다녀온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그곳도 고려하고 있어요.

한 달 살기, 할까 말까?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가면 돼요. 갔다가 아니면 돌아오면 되니까요. 한 달 살기가 자신과 맞지 않거나 급하게 다른 일을 해야 한다면요. 너무 무겁게 생각할 필요 없죠. 많은 고민을 접고, 일단 떠나는 것도 방법이라 생각해요. 떠나세요. 후회는 없습니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세화 해수욕장의 시간은 내게 삶의 여유와 안정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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