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살기의 민낯 – 1탄 발리에서 김정영

내 집이 아닌 타지에서 ‘한 달’이란 시간을 허하는 것. 그곳에서 투명하게 나를 마주하는 것. 일생에서 어찌 보면 이 짧은 기간을, 모두 방점으로 기억했다.

기획1_ 발리에서 김정영 | “미뤄둔 행복을 ‘지금’으로 당겨와 보길.”
기획2_ 제주에서 박지원 | “언제든 돌아와도 좋으니까.”
기획3_ 포르투에서 김가람 | “어쩌면 발견하지 못했을 순간들이 있어요.”
기획4_ 치앙마이에서 신혜원 | “또 다른 도전에 덜 망설여져요.”

김정영의 한 달 살기
MAJOR_ 한양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
PLACE_ 인도네시아 발리
TIME_ 2018년 4월 9일~2019년 2월 중순

3학년 2학기 기말고사 시험 기간이었어요. 많기로 유명한 저희 학과 조모임과 부전공인 경영학과 조모임, 시험공부, 아르바이트, 동아리, 공모전 준비∙∙∙ 이 모든 걸 동시에 하던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내 행복은 대체 어디까지 미뤄져 있을까?

대학 가면, 취업하면, 승진하면 행복해질 거야 고등학교 때 원하는 대학에 가려고 열심히 공부했고, 그 목표를 이룬 시점이었죠. 그런데 누군가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그렇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또다시 행복할 준비만 하는 중이었으니까요. 취업해서 돈을 잘 벌면, 승진하면∙∙∙ 이렇게 미루고 또 미루다가 대체 난 언제 행복해지나 생각한 그 순간, 공부하던 책을 덮고 발리행 항공권을 사버렸어요. 그것도 편도 티켓만이요. 저의 발리 열 달 살기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년 전 서핑의 황홀한 경험 이후 처음으로 보드 위에 두 발로 섰던 순간! 너무나도 짜릿했고, 균형을 잃어 파도에 몸을 던지는 순간까지도 즐거웠어요. 보드 위의 햇살, 바람, 파도 모든 것이 완벽했죠. 밤바다의 불빛, 웃음소리, 몽롱함이 모두 꿈만 같았습니다. 전 행복한 감정을 찰나의 순간으로 저장하곤 해요. 이 기억은 마치 사진 몇 장 같으면서도 슬로우모션으로 찍은 영상처럼 흐릿하고 느리게 움직이며, 카메라로는 담을 수 없는 어떤 벅찬 것을 담고 있죠.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이 감정에, 저의 한 학기를 오롯이 쏟아 붓고 싶었어요. 발리는 저처럼 최저 시급을 받아가며 열심히 돈을 모아 서핑하려는 대학생에게 최적의 장소예요. 매일 좋은 파도가 있고, 2천 원이면 맛있는 현지 음식으로 배를 든든히 불릴 수 있는 곳이니까요.


해변가의 허름한 식당. 엄마의 일을 돕는 꼬마가 이곳의 마스코트다. 3시간 서핑 후 먹는 로컬 음식은 꿀맛!

부모님을 설득할 만한 동기가 있을까 여느 부모님처럼 저희 엄마도 걱정이 참 많으세요. 어릴 때부터 ‘삐쩍 골은’ 제가 다칠까 인라인스케이트조차 못 타게 하셨대요. 성인이 된 후에도 해외여행은 물론 국내 여행조차 혼자 하는 걸 허락하지 않으셨죠. 엄마를 설득하기 위한 보고서 5장을 만들었습니다. 위치, 기간, 비용은 물론 여행을 떠나기 전 어떤 생산적인 생활을 보낼지, 더불어 검색창에 발리를 검색하면 나오는 여행 중 위험요소에 대한 대책까지 꽉꽉 담았어요. 기말고사 기간의 보고서는 슬럼프가 온 저의 도피처였답니다.
보고서를 완성했을 즈음, 엄마에게 용기를 내 전화했어요. 다음 학기 휴학을 해서 자비로 4개월 정도 서핑하러 다녀오겠다고 했죠. 말이 끝나자마자 순간의 정적. 그 짧은 순간에 별의별 생각을 다 했죠. 너무 가고 싶은데 허락하지 않으면 어쩌지? 내가 다음 학기를 버틸 수 있을까? 그런데 수화기 너머로 의외의 말이 들려
왔어요. “그래, 그럼 다녀와.” 보고서를 보낼 필요가 없어져 허무한 반면, 무모할 수도 있는 딸의 결정을 믿고 응원하는 부모님께 너무나도 감사했습니다.

발리야 기다려, 김발리가 간다 이 결심을 간직하기보다 떠벌리면 성공할 거란 생각에 발리로 서핑하러 간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고 다녔어요. 블로그에도 결심을 남기기도 했고요. 드디어 휴학. 학교와 동아리 친구들에게 타지로 떠나는 이유로, 제가 많이 행복했던 그 순간을 이야기했죠. 그렇게 여행을 떠나기 직전, 전 김발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녀(맨 오른쪽)에겐 무엇보다 사람들과 엉켜서 만들어진 에피소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발리에서 내 이름은 각양각색 정영이란 제 이름이 외국인들에게는 발음하기 더 어려워요. 카페에서 ‘영’이라고 간단히 이름을 밝혀도, 잔을 보면 늘 Yong이라고 적혀 있죠. 서핑을 시작하면서 생긴 친구들에겐 제 이름을 그대로 소개하는데, 발음이 참 다양해요. 쩡영, 청영, 종용, 존욘 등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콩용이에요. 이를 붙인 친구가 인도네시아 니아스 출신인 니스카예요. 처음 만난 날, 니스카가 인스타그램에 다른 강습생과 찍은 사진을 올리면서 “Where is congyong?”이란 멘션을 남겼죠. 콩용의 정체를 찾느라 한국인 친구들과 인도네시아 번역기도 돌려보고 고민한 끝에, “설마 제 이름은 아니겠죠?”라고 한 순간 웃음바다가 되었지 뭐예요. 인도네시아에서 C는 jj나 ch로 발음된대요. 이후 전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게 더 좋아요. 각 친구가 기억 속에 더 특별하게 남는 것 같아서요.


바다에서 현지 친구들과 인사하고 이야기하고 실없이 웃으며 장난쳤던 시간. 이별은 피할 수 없겠지?

배경이 아닌 진짜 얼굴과 마주하기 파도를 찾아오거나 행복을 향해 무언가를 버리고 오거나, 발리엔 한국 사람들이 많아요. 저는 이들과 자주 밥을 먹고 술도 한 잔씩 하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눠요. 어떤 일을 하고 어디에 사는지, 돌아가면 무엇을 할 건지 등에 대해서 말이죠. 저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조금씩 어둡고 걱정이 묻어 나왔어요. 우리들만의 파라다이스인 이곳에서도 현실과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거죠. 우울함에 젖어 들어가려고 할 때쯤 서로 말해요. “우리 이런 이야기 말고 재미있는 이야기할까?”
저는 이제 사람들의 배경, 히스토리가 궁금하지 않아요. 어쩌면 찌들어 있을 수밖에 없는 본 모습과는 다른 사회 속 모습이 아니라, 원하는 걸 할 때 나오는 진짜 얼굴을 먼저 마주하고 싶어 묻지 않죠. 대신 매일 바다로 나가며, 서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요. 나이와 지위를 떠나 들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에요. 이들을 잘 모르면서도, 오히려 깊게 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발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제게 어떤 정보가 아니라 표정과 감정으로 기억되고 있어요.


cheers! 집들이 파티에서 밤새 서핑이야기를 나눴다.

바다가 가르쳐준 자존감을 아시나요 바다는 정직해요. 화장도 소용없고, 머리 손질도 필요 없죠. 심지어 어떤 옷을 입어도 체형을 커버하기보다 그대로 드러나도록 만들어요. 처음에는 이런 바다가 두려웠어요. 화장으로, 옷으로 제 단점을 감추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에서요. 처음엔 꽤 오랫동안 긴 팔 래시가드와 워터 레깅스, 반바지까지 입어 몸을 꽁꽁 감추고 서핑했어요. 화장하고 바다에 들어가 보기도 했고, 며칠 동안 지속되는 눈썹과 입술 타투 펜을 사서 바르기도 했죠. 시간이 지나면서 얼굴이나 몸매가 어떻든 자기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뱃살이 튀어나오든, 겨드랑이에 군살이 있든, 다리가 짧든 굵든 예쁜 비키니를 입고 바다를 즐기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은 자연스러웠죠. 그냥 그 자체였어요. 남들 시선을 의식해 절 꽁꽁 숨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후 워터 레깅스, 반바지, 래시가드 순으로 콤플렉스를 감추던 옷을 하나씩 벗어나갔죠. 제게 큰 변화였어요. 이제 비키니는 단순한 노출이나 타인에게 매력을 어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존감을 회복하는 수단이 되었어요.

발리에 장기 체류하는 법 인스타그램에 검색하면 가장 먼저 뜨는 곳보다 숨겨진 장소를 찾아다니길 추천해요. 몇 번은 실패하더라도, 그조차 즐거운 추억이 될 테니 말이에요. 발리는 물가가 싸기 때문에, 한 달 이상의 시간을 보낸다면 무언가를 배우라고 추천하고 싶어요. 한국에서 쉽게 배우지 못하는 인도네시아어는 배워서
실생활에서 연습까지 할 수 있으니, 한 달 살기의 기억을 두 배로 특별하게 하는 경험이겠죠. 언어 외에도 레슨비가 비싼 악기 등도 좋으니, 현지에서 도전하길 바라요.


입수 전! 서프버디들과 함께. 서핑은 함께 할 때 가장 즐겁다.

7개월째 발리에서 ‘안’ 떠나는 중 원래 계획했던 4개월 중 반은 발리에서 서핑을 배우고, 나머지 기간엔 호주와 스리랑카, 하와이 등 유명한 서핑 스팟을 돌아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서핑은 생각보다 매우 어려운 스포츠였어요. 이렇게 천천히 실력이 느는 운동이 있을까 싶을 정도예요. 더불어 생각보다 훨씬 매력적인, 헤어 나오기 힘든 스포츠였죠. 결국 한 학기 휴학을 한 번 더 하기로 해 10개월 계획으로 변경했어요. 부모님도 외국에서 살아보는 게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거라며 허락해 주셨죠. 딸을 믿어준다는 사실에 감동해 전화를 끊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네요. 지금 7개월째 발리에서 매일 서핑 중이에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도 무언가 잘 해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을 매일 쌓으면서요.

평생 유효한 마음 보험 한국의 평범한 대학생에게 발리에서의 1년 여행이란, 무모하죠. 보험 없이 미래에 대한 준비를 잠시 접어두는 거니까요. 하지만, 전 인생에서 처음으로 온전히 저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취업을 위한 스펙이 아니라 인생을 좀 더 반짝이게 해줄 마음의 스펙을 쌓는 시간이죠. 아무 연고도 없는 외국에서 혼자 열 달을 살았는데, 뭐가 무서울까요? 저는 앞으로의 길에 밑거름이 될 경험을, 자존감을, 믿음을 얻었어요.

발리, 그다음은요 발리 생활을 하기 전으로 돌아가는 건 상상도 하기 싫어요. 너무나도 큰 행복을, 시야를, 내적 성숙을 얻은 이곳에서의 시간이 제겐 너무나도 소중하기 때문이죠. 만약 다른 국가에서 장기 체류할 기회가 생긴다면, 호주로 가고 싶어요. 서퍼들의 천국이니까요. 언젠가 또 행복에 대한 고민이 고개를 들이밀 때를 위한 탈출 티켓으로,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조금 아껴 두려고 합니다.

한 달 살기, 할까 말까? 저는 발리의 서핑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고 있어요. 역마살이 낀 사람들의 집합소죠. 재밌게도 이곳에서의 사람들은 서로를 부러워해요. 발리에 살며 매일 서핑하는 서핑 게스트하우스 사장님, 직장을 옮기는 사이 두 달 동안 여행 온 영어학원 선생님, 퇴사를 하고 4개월을 서핑하러 왔는데도 언제든 돌아오라는 러브콜을 받는 엔지니어, 발리에서 지내며 스냅 사진을 찍어 돈을 버는 사진가, 그리고 회사에서 전 직원의 복지 혜택인 해외 한 달 살기를 누리는 SNS 여행 콘텐츠 크리에이터들… 앞길이 막막한 저는, 충분히 겅력을 쌓으면서도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내는 능력자 모두를 부러워했죠.
그런데 이들 모두 부러워하는 것이 있어요. 바로 스물셋이란 제 어린 나이죠. 직장과 결혼, 자녀 등 감당해야 할 책임이 늘어나면 이렇게 빠져들 기회를 잡기 쉽지 않다면서 말이에요. 이 시기에 좋아하는 걸 이미 알고 푹 빠져 지내는 제가 부럽다고 했어요. 전, 미래의 제가 부러워할 지금의 저를 좀 더 즐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 길이 성공에 직진하는 길은 아니더라도 말이죠. 혹시나 행복을 망설이는 이유가 단지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주저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한 번쯤은 미뤄둔 행복을 당겨와 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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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Social Challenger 김민지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콘텐츠 크리에이터 작성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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