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세가와 요헤이 l 93분간의 미풍의 기록

‘김창완밴드’ 기타리스트?’장기하와 얼굴들’ 객원 기타리스트

눈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라고 어느 시인이 말했던가. 그의 눈은 몇 년 후에도 무대 한 켠에서 기타 줄을 튕길 미래를 투명하게 반영했다. 기타리스트이기 이전에, 인생을 마주하는 가벼우면서도 견고한 ‘한 사람’과의 롱런 대화. ‘하세가와 요헤이’라는 미풍이 지나간 자리엔, 오랜 생각의 파고가 휘몰아쳤다.

사진 박보람/제16기 학생 기자(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샐러리맨을 꿈꾸던 소년, 기타리스트가 되다

하세가와 요헤이의 어린 시절은 마치 여느 일본 성장소설의 남자 주인공 같았다. 양친이 모두 현직 배우였던 하세가와 요헤이에게 ‘너도 어른이 되면 배우가 될 거냐?’라는 질문은 항상 따라다니는 꼬리표였고, 그는 그 말이 참 싫었다. 그래서 그는 일종의 반작용으로 평범하게 대학을 가려고 했다. 미래를 펼쳐 보라는 작문 시간에는 돌멩이처럼 살고 싶다고 적었고, 장래희망은 ‘멍하니 창가만 바라보는 샐러리맨’이었다. 그때 그에게 기타란 아직 방 한구석에 가만히 놓여 있는 존재에 불과했다.

기타를 치고 싶어서 샀는데, 거의 치지 않았어요. 어느 순간부터 조금 좌절감이 생기면서 기타랑 나는 안 맞는다고 생각하며 손을 놓았죠. 그러다가 열여덟 살이 될 때 즈음 제가 일렉트로닉 기타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저한테 밴드를 한번 해보자고 권유했어요. 그래서 다시 기타를 만지게 됐죠.

고등학교 내내 밴드 활동을 하면서도 그는 대학교 진학을 준비했다. 하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스무 살의 하세가와 요헤이는 마침내 음악을 본격적으로 해 보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때부터 일본에서 시작된 5년간의 기타리스트 생활은 음악인 하세가와 요헤이의 출발인 동시에 그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과도기이기도 했다.

음악을 하겠다고 하자 아버지가 “딱 5년만 지원해 줄 테니 좋아하는 걸 해봐라. 어떻게 하나 보자.”라고 하셨어요. 전 그때부터 5년 동안 밴드 생활을 하며 매일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음악만 했죠. 온갖 기타를 다 사고 쳐 보고, 또 그만큼 되팔았어요. 모르는 사람들은 아버지 돈으로 놀았으니 부러운 5년이라 말하지만, 저는 그 시기가 정말 괴로웠어요. 뭔가를 꼭 이루어내야 하는데,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 돈도 벌지 못했고 해놓은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거든요. 그러다 5년이 지나니 모든 지원이 끊겼고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죠.


그때 그에게 광명 같은 충격을 안겨주고, 압박감을 목적의식으로 바꾼 어떤 것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아는 일본인 친구가 한국에 다녀온 뒤 ‘한국, 죽이더라!’ 하며 건네준 ‘신중현과 엽전들’, 그리고 ‘산울림’ 앨범의 녹음테이프였다. 그것을 듣는 하세가와 요헤이의 마음에는 급회전과 같은 변화가 있었다. 그는 고민하던 런던 유학 행을 포기했고, 곧 한국으로 떠나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한국 음악은??? 격했어요. 영국이나 어디 음악이나 대충 예상이 돼요. 근데 한국음악은 예상 불가였죠. 특히 ‘산울림’의 음악은요. 다른 나라에서 찾을 수 없는 감성이나 느낌이 있었어요.

김양평’이 된 한국의 일본인

그가 한국에 온 것은 1995년도. ‘소녀시대’와 ‘카라’가 일본을 누비는 요즘 세대들은 상상도 어려울 만큼 일본과 한국 사이의 기류가 냉랭했던 시기였다. 그 때문에 그는 온갖 희한한 일을 다 겪었다. 장발의 하세가와 요헤이는 그냥 걸어만 다녀도 손가락질을 받았고, 다가와서 머리를 잡아당기며 ‘남자가 왜 머리가 기냐?’라고 묻는 강한 한국스타일 아줌마도 있었다. 압권은 그와 그의 일본인 친구들로 이루어진 밴드 ‘곱창전골’이 계획했던 공연이 정부의 제재로 엎어진 사건이었다.

일본에 갔을 때 ‘곱창전골’이 파티에서 한국 노래를 불렀는데,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한국 유학생들도 재미있다면서 반응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한국 현지에서도 공연하려고 했는데, 당시 문화체육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갑자기 이를 제지하는 연락이 왔어요. 어차피 한국노래를 부를 거고 아마추어 밴드인데 뭐가 문제냐고 했더니 그래도 일본인이니까 만약 공연하면 멤버들을 다 출국시키고 앞으로 몇 년 동안 못 들어올 거라고 하더라고요.


마음 상할 수 있는 일투성이였지만, 하세가와 요헤이는 사실 한국에서 겪는 일련의 사건들이 오히려 재미있었다. 마치 내가 왼손을 들면 거울의 내가 오른손을 들듯, 비슷하게 생겼지만 일본인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한국인이 흥미로웠다. 공연을 봐도 그냥 손뼉을 치고 마는 일본인과는 다르게 한국인들은 소리만 나도 다이빙을 하고 난리를 치는 뜨거움이 있었다. 그는 한국말도 잘하지 못하는 상태로 매일 홍대 공연장을 돌며 밴드 공연을 보러 다녔다. 곧 ‘어떤 일본인이 맨날 공연을 보더라.’라는 소문이 인디 뮤지션들 사이에 퍼졌고, 곧 하세가와 요헤이와 뮤지션들은 보디랭귀지와 피보다 ‘찐한’ 소주가 이어준 한국식 형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한국으로 이끈 ‘산울림’의 김창완과도 형제가 되리라고는 그도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제가 한국에 와서 ‘허벅지 밴드’, ‘황신혜 밴드’, ‘이지형’, ‘델리 스파이스’, ‘뜨거운 감자’ 같은 뮤지션과 함께 작업을 경험하던 중 2005년 김창완 형님이 8년 만에 공연을 한다고 하셨어요. 그때 세 명의 멤버로만 공연하기가 미흡해서 추가로 기타리스트를 영입하려 하셨죠. 아마도 ‘산울림’을 잘 아는 기타리스트를 찾다 보니 저한테 얘기가 오게 된 것 같아요. 저는 제가 그 밴드를 좋아해서 한국에 온 건데, ‘진짜 이런 일이 있구나.’ 싶어서 긴장도 했고 진짜 놀랬죠.

김창완 밴드와의 인연과 함께 ‘김양평’이라는 한국식 이름도 갖게 되었다. 태양의 ‘양’, 평범할 ‘평’이라는 뜻인 요헤이를 한국식으로 풀이한 이름과 김창완의 성인 ‘김’의 조합이다.

꿈을 물속에 놓아버린 남자

수많은 밴드와 인연을 맺어온 하세가와 요헤이는 최근에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객원 멤버로 참여하고 있다. 음악에서 평생 배우고 살아가고자 하는 그의 시도 중 하나다. ‘소녀시대’, ‘2ne1’의 노래를 듣고는 인기에 대한 치밀한 연구가 숨겨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순수하게 감탄하는 그. 하세가와 요헤이는 뮤지션의 아집이나 대중에 대한 날 선 반감조차도 없다. 단지 그 자신의 음악 세계를 유유히 유영해갈 따름이다.

너 이게 얼마나 명곡인지 아니? 이런 노래는 알아?” 자칭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더 이런 식으로 말할 때가 잦아요. 제가 봤을 때 ‘네가 음악을 아느냐.’고 말하며 자부심을 느끼는 그런 사람들은 더 이상 배우고 싶은 것이 없는 거죠. 저는 그냥 제 음악 세계를 넓히고 싶고, 새로운 것도 말고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고 싶어요. 음악을 하면서 쓸데없는 자존심은 필요 없어요.

음악을 하다가도 어느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는 마음이 자라난다. 그 또한 욕심과 현재의 능력이 차이날수록 빠지게 되는 슬럼프를 겪어도 보았다. 그러나 그가 그 먹구름을 결국 걷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음악을 해왔던 터다. 그는 새벽녘 홍대 앞 미술학원에 학부모들의 차가 줄을 서는 한국 고유 혼돈의 풍경을 안타까워했다. 우리 나이에 필요한 것은 학원에서의 시간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시도하는 용기와 포기하지 않는 끈기이므로.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만큼이라도 별로라고 생각되는 일이라면, 그건 안 하는 게 맞아요. 하지만 좋아한다면 망설이기보다는 해야죠. 정말 그 일을 좋아해서 자기가 선택했다면 혹시 나중에 일이 잘 안 풀렸더라도 후회가 덜할 것 같아요. ‘그때 그것만 했었더라면!’이 아니라 ‘그래도 그때 그걸 하고 싶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겠죠. 그게 차라리 낫지 않아요?

과장된 과거를 말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에게는 거창한 미래도 없었다. 꿈을 생각하면 꿈에 매달리게 되고, 그렇게 시달리다 보면 꿈도 꿈으로 끝날까 봐서 그는 꿈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고 말했다. 꿈이 아니라 꿈에서도 생각지 않았던 ‘산울림’과 그가 지금 함께 공연하듯, 그는 그저 언젠간 ‘아, 일이 이렇게 되었네요.’라고 말하게 될 꿈과의 기쁜 조우가 있을 수도 있겠다고 짐작만 할 따름이다. 누군가는 꽁꽁 얽매이는 문제들을 그는 이미 잊은 듯했고, 누구는 오래전에 잊었을 좋아하는 것에 대한 마음을 이야기했다. 화려하게 장식된 스토리 사이에 둘러싸여 살다 보면 문득 장식을 싹 걷어낸 원형의 감성이 그리워지는 순간이 있다. 그것을 잃지 않은 하세가와 요헤이의 가볍고 또 견고한 이야기들은, 인생을 마주 보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를 오래도록 생각게 했다.

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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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장문의 글을 한 숨도 쉬지 않고 재미있게 읽었네요.
    ‘그래도 그때 그걸 하고 싶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지.’
    ... 저 또한 제 현재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 박상영

    ㅜㅜ아아 정말 이렇게 좋은 분이 계셨다니!!
  • 황선진

    좋아하는 김창완씨 밴드라서 얼른 들어와서 깊숙하게 읽고 갑니다 :-)
  • wannaasone

    멋쟁이 양평씨. 언제가 됐든 언젠가 뜨감의 공연에 함께 서 주었으면 합니다. 냉큼 보러갈테요.
  • N

    돌멩이가 되고 싶었다는 그의 말이 왜이렇게 특별하게 느껴질까요ㅎㅎㅎ하루종일 창밖을 내다보는 회사원도 어쩌면 아주 서사적이네요. 그를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게 했던건 아마 그의 넘치는 감수성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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