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수선가 재영 | 책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수선가

책, 좋아하시나요? 독서 말고, ‘책’ 말이예요. ‘책을 읽는다’는 말은 사실 책 속의 글자와 내용에 집중돼 있죠. 전자책이나 듣는 책처럼 종이책을 대신하는 매체가 많아졌지만, 속지의 냄새와 빳빳한 커버, 묵직한 질량은 대체 불가능한 종이책만의 매력입니다. 귀퉁이의 낙서, 누렇게 뜬 기름때, 바스러진 페이지처럼 주인의 시간과 흔적을 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의 책이기도 하고요.

여러분께 소개할 오늘의 피플은 추억을 가득 품은 종이책을 고치고 변화시키는 마법사, ‘재영책수선’의 책 수선가 재영 님입니다. 어렸을 적 닳도록 읽으며 아꼈던 책 한 권을 떠올리며 작업실 문을 두드려볼까요?


낡고 닳은 책들은 곧 재영 님의 손을 거쳐 새로운 모습을 지니게 된다.

Q .

책 수선은 다소 생소한 개념인데요, ‘책 수선가’를 직업으로 삼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A .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미대에 진학한 뒤 다양한 매체를 탐색하다가 최종적으로 정착한 게 책 수선인 거죠. 미국의 대학원에서 북아트와 페이퍼메이킹이라는 전공을 택했지만, 책 구조에 대한 지식이 아예 없었어요. 원래 전공은 그래픽 디자인이었거든요. 그래서 기본적인 지식과 테크닉을 가장 빠르게 익힐 수 있다는 책 수선 일을 시작했죠. 학교 도서관의 랩에서 일하면서 기본기만 배우고 그만둘 생각이었는데, 하면 할수록 작업이 너무 재밌더라고요. 글자만 읽을 때는 보이지 않던 책의 내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고, 작업중에 요구되는 세심함과 인내심이 성격과 잘 맞았어요. 한마디로 재밌고 편안했죠. 물론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 재미를 맛본 뒤에는 이쪽 일을 해야겠다 결심했고, 2019년에 재영책수선을 열었어요.

Q .

북아트와 페이퍼메이킹이라는 전공은 국내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분야 같아요.

A .

북아트는 말 그대로 책을 매체로 두는 예술분야입니다. 다양한 제책 기술과 레터 프레스 등을 실험하고, 그 기술을 활용해 이야기를 만들어 표현하는 것이죠. 페이퍼메이킹은 손으로 종이를 직접 만드는 법을 다루는 전공인데, 미국에서 비교적 발달한 분야예요. 이렇게만 들으면 한지가 연상되기도 하고, 산속에서 전통 의상을 입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죠. 저도 한국에서는 잘 몰랐던 분야인데, 미국에 가서야 이런 걸 따로 가르치는 학과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Q .

본래 전공과 다른 길을 선택하셨는데 선택의 과정에서 남들과 속도를 맞춰 취직하거나 정착해야 한다는 강박은 없었나요?

A .

없었다면 거짓말이죠. 다들 졸업할 때쯤 대학원에 갈지, 회사에 취직할지,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잖아요. 저는 이런저런 사정 덕에 또래보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여유가 있다고 해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선택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니까. 사실 우연이 많았고, 운도 따랐던 것 같아요.

Q .

어떤 운이 재영님을 도왔나요?

A .

제가 선택한 대학 내에서 북아트와 페이퍼메이킹이 굉장히 좋은 학과로 손꼽혔어요. 이왕이면 인프라가 잘 갖춰진 곳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고 싶었고,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던 북아트에 대해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죠. 게다가 대도시에 있는 대학이 아니라 한국 사람도, 다른 놀 거리도 별로 없었어요. 학교와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죠. 그래픽 디자인 경험도 도움이 많이 됐어요. 결국에는 미술이라는 커다란 범주 안에 속한 것이니까 북아트 전공 내에서도 그래픽, 편집 디자인 기술을 쓸 줄 안다는 건 큰 장점이었죠. 지금 되돌아보면 선택의 순간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려고 노력했어요.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시간을 담뿍 흡수한 책을 마주한다는 것

작업에 필요한 다양한 종류의 종이와 도구들.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은 한정적이라 미국에서 공수해온 재료를 쓴다.

Q .

그렇다면 책 수선은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되나요?

A .

온라인으로 문의를 받고 미팅 일정을 정합니다. 아무래도 의뢰자의 의견과 책에 담긴 개인적인 이야기가 중요해서 미팅의 비중이 커요. 2차, 3차까지 이어지기도 해요. 그리고 작업 시작 전 의뢰 받았을 때와 작업이 끝나고 난 후 책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둡니다. 개인적인 기록뿐만 아니라, 수선을 통해 변화한 부분을 설명해 드리기 위해서죠. 의뢰자 분에게 완성된 책을 돌려드리면 작업은 끝납니다.

Q .

의뢰받은 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나요?

A .

최근에 소설책 <모모> 의뢰가 들어왔어요. 예전에 유행했다가 최근에 다시 유명해진 아동청소년용 도서라고 하더라고요. 어떤 분이 어렸을 때 읽었던 <모모>를 맡기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분이 판 수만 다른 <모모>를 또 맡겨 주셨어요. 단순히 같은 책이 들어와서 기억에 남는 건 아니에요. 두 분이 원하는 수선 방향이 완전히 달랐거든요. 한 분은 낙서나 손때 같은 자국을 그대로 살리길 원하셨지만 다른 한 분은 모든 형태의 흔적을 모두 없애길 원하셨죠. 게다가 싫어하는 캐릭터가 나오는 부분도 삭제해달라고 요청하셨어요. 그래서 한 <모모>는 조금이라도 원본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원래 있던 비닐 커버까지 다시 만들어서 씌웠어요. 다른 <모모>는 의뢰자분이 좋아하는 부분만 편집해 남길 예정이에요. 같은 책이라도 소유자의 취향과 추억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는 걸 느꼈죠,

Q .

가장 작업하기 어렵거나 까다로운 유형의 책이 있나요?

A .

아무래도 오래된 책이겠죠. 요즘 나오는 책들은 중성지를 쓰기 때문에 오래 지나도 상태가 나쁘지 않은 경우도 많아요. 하지만 재영책수선에는 대부분 몇 십 년 전의 책 의뢰가 들어 오거든요. 당시에는 종이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하게 산화된 책들이 많습니다. 시간이 지나 산화된 종이는 접히거나 구겨지는 정도를 넘어 아예 먼지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작업하기 쉽지 않죠. 하지만 감정적인 면에서는 사실 모든 책이 어려워요. 제게 맡겨지는 모든 책은 의뢰자에게 단 하나뿐인 소중한 책이니까요. 새것으로도 절대 대체할 수 없는 책을 다루기 때문에 매 작업이 어렵고 조심스러워요.

Q .

책을 수선할 때 크게 신경 쓰는 부분이나 애정을 갖고 있는 부분이 있나요?

A .

일단 면지에 신경을 가장 많이 쓰는 편입니다. 면지는 커버와 내지를 부착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거든요. 면지가 튼튼하고 깨끗이 붙지 않으면 책 자체의 내구성이 떨어지고, 시각적으로도 깔끔하지 않아 전체적인 완성도가 떨어져요. 헤드밴드(책등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에 붙이는 색실) 부분입니다. 요즘에는 엮을 필요 없이 바로 쓸 수 있도록 간편화된 ‘페이크 헤드밴드’가 많이 나오지만, 예전에는 직접 한 올 한 올 감아서 제작했거든요.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더 다양한 색깔과 패턴을 사용해 책의 분위기에 딱 맞는 헤드밴드를 쓰고 싶다는 욕심이 있긴 해요.

Q .

책 수선은 다른 분야에 비해 활발하지 않은 편인데, 작업 중 영감이나 레퍼런스가 필요할 때는 어떻게 하시나요?

A .

과거에 만들어진 책에서 많은 영감을 받아요. 요즘 책 생산은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도맡아 하고, 출판사가 편집하고, 인쇄소에서 생산하는 일괄적인 구조가 많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표지의 금박을 담당하는 사람, 커버를 만드는 사람, 가죽을 다루는 사람이 따로 있었어요. 그 시절의 책에서 최근 획일적인 대중 서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다양한 모습을 보곤 해요.


책등을 제도하고 표지의 오래된 가죽을 벗기는 과정.


삶 속의 책, 책 속의 삶

Q .

망가진 책을 수선하고 싶어하는 의뢰자가 꽤 많다고 들었는데, 재영책수선을 열기 전에 이런 수요를 예상했나요?

A .

예상 못 했어요. 안될 거라고도, 엄청 잘될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한국에서의 수요를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늠이 전혀 안 됐죠. 그런데 재영책수선을 운영해 나가면서 느끼는 건, 책을 고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었다기보다 이런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기 때문에 맡기지 못했던 분들이 많다는 거예요. 새 책을 사는 것보다 비용이 훨씬 많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맡겨 주시는 분이 많아서 감사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요. 종이책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이 여전히 크다는 사실을 느끼는 순간이 많거든요.

Q .

한 인터뷰에서 “책이 수선되기 전 망가진 형태에 관심이 많다”고 밝혔는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A .

처음에는 평상시에 쉽게 보지 못하는, 숨겨진 책의 모습에 관심을 가졌어요. 책을 일부러 해체하지 않는 이상 책 구조를 속속들이 관찰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계속해서 책을 관찰하고 수집하다 보니 망가진 모습 자체가 뿜어내는 형태미에 이끌렸어요. 요즘에는 정보 전달뿐만 아니라 인테리어를 위한 책도 많잖아요. 책의 역할이 더욱 넓어진 거죠. 책이 ‘읽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확장된 것처럼, ‘뜯어지고 부서진 책도 단순히 고장 난 물건에서 그치지 않고 좀 더 확장된 의미를 지닐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망가진 책을 관찰하고 있어요.

Q .

트위터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외국 서적을 소개하시는 등 문학에도 관심이 많아 보입니다. 이러한 선호가 작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나요?

A .

부끄럽지만 저는 독서 자체를 매우 즐기는 편은 아닙니다. 책을 좋아한다는 말의 의미는 보통 두 가지겠죠. 책이 품고 있는 정보, 이야기가 좋아서 그것을 습득하기를 즐긴다는 것. 혹은 책이 주는 여러 감각, 구조 자체가 좋다는 것. 저는 후자에 더 가까워요. 책의 내용과 외형적 특징이 찰떡같이 맞아떨어지는 책들을 보면 정말 기뻐요. 이런 취향 때문에 북아트, 책 수선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Q .

얼마 전부터 책 수선 중에 발생하는 종이 찢는 소리, 가죽을 제거하는 소리 등을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하셨어요.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A .

앞으로도 비슷할 것 같아요. 수선 과정을 영상으로 공개하는 건 재영책수선의 노하우, 테크닉과 직결되는 데다가 그럴 만한 역량도 아니기에 조심스러워요. 많은 분이 책 수선의 시각적인 부분을 가장 궁금해하시지만, 사실 저는 책에 관련된 다른 감각들도 존재한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어요. 그래서 소리로 시작한 거예요. 앞으로 어떤 영상이 올라갈지 모르지만, 천천히 눈에 보이는 책의 모습뿐만 아니라 다양한 감각을 전해드리기 위해 노력할 예정입니다.

Q .

책을 오래 보존할 수 있는 팁을 공유해주세요.

A .

자외선 노출을 최대한 피하고 통풍을 잘 시켜주는 것. 이 두 가지가 제일 중요해요. 책을 180도로 펼쳐서 보는 것도 책등을 망가뜨려요. 하지만 이건 책을 새것처럼 보관하고 싶으신 분들을 위한 조언이고, 솔직히 저는 책을 험하게 봐도 좋다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 많이들 그러죠. 책을 던지기도 하고, 낙서도 하고, 물에 빠뜨리고. 하지만 이렇게 책을 보는 방식도 독서의 즐거움을 확장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봐요. 책이 상하는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편하게 즐겨도 되지 않을까요? 얼마든지 원한다면 새 책을 구하기 쉬운 시대이기도 하고요.

Q .

마지막으로, 재영책수선 주인장으로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A .

현실적인 목표는 유지하고 살아남는 것. 생각보다 의뢰인이 많다고 언급했지만, 말 그대로 ‘생각보다’ 많은 거예요. 여타 활발한 산업에 비하면 절대적으로 수요가 불안정하고 비규칙적이죠. 이것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일을 오래 지속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계속될 것 같아요. 여기서 나아가 책의 의미와 역할이 확장되는 것처럼 재영책수선도 계속해서 확장해가고 싶고요. ‘수선’이라고 하면 구두 수선, 옷 수선같이 지극히 생활적인 게 떠오르잖아요. 처음에는 이것처럼 사람들이 더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끼길 바라는 마음에서 수선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어요. 그래서 좋은 점도 있지만, 단순히 망가진 책을 보수한다는 의미에 국한돼 아쉽기도 하더라고요. 다른 제 이상을 품기에는 한정적인 순간이 종종 찾아와요. 앞으로는 수선이라는 단어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해내고 싶어요. 다른 분야와 연계한다거나, 색다른 작업을 더해서. 재영책수선을 보다 넓게 펼쳐 나가고 싶네요.


책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재영책수선
책 수선의 범위는 무척 다양하다. 아주 사소한 수선부터 완전히 새로운 책으로 탈바꿈시키는 수선까지. 이에 따라 몇만 원부터 많게는 100만 원, 200만 원이 넘어가기도 한다. 책의 수선 과정과 더 많은 정보가 궁금하다면 재영책수선의 소셜 계정을 눈 여겨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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