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한 장에 나를 담다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이름, 직함, 연락처를 알리는 지금의 명함과는 달리 명함의 시초는 그 사용 용도가 달랐다. 최초의 명함 사용국가로 추정되는 중국에서는, 방문한 집의 주인이 부재중이면 깎은 대나무나 나무 판에 방문자의 이름을 적어 남겨두었다.

집주인은 이 이름을 보고 상대의 집에 찾아가는 것이 예절이었기 때문이다. 16C경의 독일과 루이 14세 때의 프랑스도 중국과 비슷한 용도로 방문자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사용했다. 동서양을 불문한 인간관계의 필수품, 명함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의 명함 역사도 짧지 않음이 짐작된다. 조선시대 세시풍속을 적은[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종이를 접어 이름을 쓴 명함을 관원이나 선생의 집에 드리는 것을 세함이라 한다’는 대목에서, 이때도 명함이 사용됨을 추측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명함은 1883년 구미 지역을 순방했던 사절단 민영익의 것으로 추정된다.

시초가 된 옛 명함과 지금의 명함은 그 형식이나 용도가 많이 달라졌으나, 단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다녀감을 알렸던 방명록 형식의 옛 명함도,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사용되는 현재의 명함도, 훗날의 만남을 위해 쓰인다는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명함이 지닌 또 하나의 기능은 ‘나’를 알리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한 ‘인연의 끈’이 아닐까?

이제 명함은 단순히 나의 이름, 직함, 주소 등 기존의 인쇄된 활자로 정보를 전달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세계에서 ‘한국의 광고 천재’라고 칭해지는 광고인 이제석(28) 씨의 명함은 ‘이제석광고연구소’라는 여덟 글자와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만 있다고 한다. 직함이나 회사명이 빈 자리에, 자신의 이름이 최고의 브랜드라는 가치관이 대신 전해지는 것이다. 건축회사 ㈜간삼파트너스 대표, 김자호(64) 씨의 명함엔 회사이름과 연락처는 있지만 정작 중요한 이름이 인쇄되어 있지 않다. 직접 이름을 써내려 가는 걸 상대가 보게 함으로써 신뢰를 주기 위해서다.


뿐만 아니라 명함은 텍스트를 ‘인지하도록’ 하는 것에서 감각적으로 ‘느끼도록’ 진화하고 있다. 2007년 ㈜아시아나 항공 직원들의 명함에 적용된 점자명함은 다른 기업들에게도 상용화 된지 오래다. 또한 기발한 디자인으로 그 사람의 특징이나 직업이 기억에 깊이 남도록 하기도 한다. 영국의 유명한 설치미술가 샘 벅스턴(Sam Buxton)의 명함은 텍스트 하나 새겨져 있지 않아도 그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얇은 철판으로 만들어진 명함에 나 있는 흠집대로 접으면, 책상에 앉아있는 사람 모습으로 변신하는 기발함은 그만의 개성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디자인에서부터 명함을 건네는 행위까지 남과 차별화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패션도 진화하는데 하물며 ‘제 2의 얼굴’이자 복잡한 네트워크를 만들어주는 명함이 발전되지 않을 리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겉모습의 진화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모아지는 개수가 점점 많아지는 명함, 하지만 그만큼 한 장 한 장이 가벼워지는 이유는 아마도 똑같은 타이틀, 똑같은 직업 군, 업무 군이 그 사람을 수많은 종이 중 하나로 정의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물론 사회생활 속에서는 정해진 타이틀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만의 명함을 만들고 싶은 당신이라면, 자신을 알아가는 새로운 접근의 방식이 필요하다. 여기, 명함 코디네이터 유장휴의 ‘나만의 명함’ 샘플들을 보며 자신만의 명함을 계획해 보자.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을 정리한 키워드 속에서 가장 하고자 하는 일을 발견할 수 있다. 하는 일, 하고자 하는 일, 꿈 등을 적어 다니며 ‘나’를 일깨운다. 또 명함을 받은 사람은 키워드 속에서 공통되는 관심사를 찾을 수 있다.


핵심적인 단 한 문장 속에 ‘나’를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매력이 숨어있기도 하다. 아마 받는 상대방 또한 명확하게 기억할 것이다.


별 하나하나를 목표와 희망으로 수놓아, 자신만의 별자리를 만든다. 그 자리들이 지나가는 과정이거나 거쳐야 하는 숙제다. 하지만 쓰고, 보고, 간직하면서 이루기를 바라는 꿈이 되기도 한다.심적인 단 한 문장 속에 ‘나’를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매력이 숨어있기도 하다. 아마 받는 상대방 또한 명확하게 기억할 것이다.


명함의 뒷면은 가치관을 형성시킨 수많은 키워드들로 수놓는다. 그리고 이 폼의 모티브가 된 ‘포도 생산지 연결그림’처럼 자신을 이끄는 키워드를 연결한다. 포도 생산지가 연결되고 숙성되듯, 자신을 성숙시키고 성장시키는 키워드가 곧 가치관이 된다.

핸드폰의 주소록, 인터넷 메신저가 명함의 기능을 대신하는 이때, 버려지는 명함만큼이나 쉽게 잊혀지는 이름들도 많아지는 요즘이다. 그러나 그만큼 이름만 써 있어도 반가움이 느껴지는 명함, 인연이 필요한 때다. 2010년을 맞아, 사무적인 용도의 명함으로서만이 아니라 ‘인연의 끈’과 ‘자기 탐색의 방법’으로 나만의 명함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춘추시대의 공자가 썼던 명함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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