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복┃ 유연한 빈둥거림

사진 속의 그가 웃고 있다. 마감에 쫓기는 만화가의 조급함은 어디로 간 것일까? 뜻밖에 수월하게 잡혀버린 약속에서 ‘서두르지 마라’는 당부로 끝난 인터뷰의 말미까지, 그는 종종 “내가 원래 낙천적이라••.•”라며 말문을 열었고 그때마다 입가에는 어김없이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개똥철학일 지라도, 좋아하는 것을 논하라

그의 만화 인생은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문사 사장이었던 친구 아버지 덕분에 고등학생 때부터 어린이 신문에 만화를 그리며 경제적으로 자립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대학을 갈 무렵 그가 선택한 전공은 건축학. 문과 체질이라고 말한 그에게는 분명히 의외의 결심이었다.

그 당시에는 내가 만화가가 될 거라 생각도 못했고, 또 만화가란 직업도 없었어요. 변호사, 교사 같은 번듯한 직업이 아니면 전부 ‘-장이’라고 불렀던 시대였죠. 그러니까 만화가는 생각도 못하고, 그저 당시 인기 있던 공대에 가려고 했어요. 그때에 공대생은 졸업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에서 모셔갔거든요. 그러니까 공대는 가야겠는데, 생각해보니까 건축학과가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공학답지 않게 예술적으로 보였지요. 그런데 당연히 건축을 1학년부터 시킬 리가 없지. 매일 물리, 수학이나 배우는 데 지치더라고요.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참으로 간단하다. 학교에 가는 대신 만화를 그리는 것. 좋은 학교, 전도유망한 전공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만화를 그리고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밤새 친구들과 술자리를 하던 시절을 통해 대학 강의에서도 배울 수 없던 정신적 성장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고 그는 전한다.

졸업을 못했어요. 학교를 6년 다녔는데 출석 미달로 졸업이 안되더라고요. 6년 동안 등록은 해 놓고 학교는 안 가고, 매일 만화만 그리곤 했죠. 기숙사에 살면서도 말이에요. 그 당시 일과를 말하자면, 아침에 친구들은 학교에 가고 저는 만화를 그리고, 저녁때가 되면 원고료 받은 걸로 다 같이 술 마시러 가서 밤새고 돌아오는 거였어요. 아주 낭만적인 시대였지요. 여럿이 모여 막걸리에다 찌개를 하나 놓고는 인생을 논하고 잘난척하고, 개똥철학 펼치고••• 대학 공부보다도 그런 경험을 통해 정신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긍정의 시각으로 행복에 도전하라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고 스무 살 때에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1946년에 태어나 전쟁을 고스란히 겪었고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그러한 상황에서 7남매의 막내로 자란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과 고생의 사연들이 쏟아질 법도 한데, 그가 풀어놓은 이야기들은 의외의 것이다. 빈곤이 너무 일반적인 시절이었기 때문에 딱히 가난을 원망해본 적이 없다는 것. 가난에 개탄하는 대신 그와 형제들은 유학을 떠나 성공하기로 다짐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그에게 유학은 곧 유일한 빛이요, 희망이었던 셈이다.

우리 때만 하더라도 유학은 생사의 개념이었지요.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에서 생존하는 길, 꿈을 이룰 길은 딱 세 가지 밖에 없었어요. 돈이 있거나 인맥이 있거나 아니면 유학을 갔다 오던가. 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유학을 가는 방법밖에 없었죠. 그래서 우리 오 형제 중 네 명이 독일에서 유학했어요. 첫째 형은 철학, 셋째 형은 독문학, 바로 위의 형은 언론학을 공부했지요. 유복하지 않은 집안에서 유학을 간다는 것이 지금 학생들은 상상이 잘 안 될 텐데, 그 당시에는 전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기 힘으로 공부했어요. 그래서 형들도 나도 공부하는데 전부 10년 가까이 걸렸어요. 그래서 품은 생각이 죽기 아니면 살기. 학위를 따기 전까지 돌아올 생각은 꿈도 꾸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의 유학생활이 힘들었을 거라 짐작하면 오산. 형제가 한 명씩 차례로 유학을 가는 바람에 그가 독일에 있을 때 즈음 큰 형님들은 귀국했지만, 딱히 외롭다거나 향수병에 걸리지는 않았다. 무엇이 제일 힘들었냐는 질문에도 그는 낙천적인 성격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즐거운 기억들을 꺼내놓았다.

나만큼 유학생활을 즐겁게 한 사람도 없을 거에요. 유학생활을 하면 두 가지 문제가 있잖아요. 돈 문제하고 외로움. 그런데 돈은 계속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충당할 수 있었고, 외로움은 원래 혼자 있는 걸 즐기는 성격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지요. 그렇게 두 문제가 해결되니까 매일 즐거웠어요. 유학생 주제에 취미생활도 즐겨서 레코드판 2백여 여장을 모으기도 하고요.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없다

그 당시 유럽 여행을 다니면서 자동차 5대를 폐차시키고 왔어요. 그렇게 여행을 많이 다녔다기보다, 그만큼 똥차들만 샀다는 거지요(웃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런 차를 타고도 참 많이 돌아다녔어요. 갈 수 있는 데는 거의 다 가봤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의 젊은 시절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유분방, 혹은 제멋대로.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셨으니 잔소리할 사람이 없었고, 또 형님들도 차례로 독일로 떠났으니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서울대 시절에는 전공 대신 만화와 술자리의 나날을 보내던 그가 유학생활에서 푹 빠져버린 것은 바로 여행. 웬만한 곳은 모두 가 보았다는 그가 젊은이들에게 당부하는 것은 살인 빼고 다 해보라는 것이다.

한번은 2백 불짜리 폐차 직전의 차를 사서 2천여 킬로미터 떨어진 지브롤터 해협까지 갔다 왔어요. 그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 오른쪽으로 커브만 돌면 자꾸 엔진이 꺼지는 거에요. 할 수 없이 근처 정비소에 들렀더니 직원이 우리를 기가 막힌다는 듯 쳐다보더군요. 엔진만 문제였던 게 아니라 차가 너무 낡아서 바퀴 나사도 다 빠진 상태였지 뭐에요. 그걸 타고 달렸으니 거의 죽을 뻔했던 거지. 그래도 꿋꿋하게 고쳐서 결국은 지브롤터를 찍고 돌아왔는데, 집에 도착하기 직전에 경찰이 잡더라고요. 뒤를 보니까 매연이 시커멓게 나오고 있던 거에요. 경찰이 이 상태로 어딜 가냐 묻기에 내일 폐차장에 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죠.

지루할 틈이 없는 빈둥거림


현재 중앙일보에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편을 연재하고 있는 이원복 교수. 그러나 마감에 쫓기는 급급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작업 스타일도 빈둥거리다가 시간이 나면 시작하는 편이라고 한다. 하루에 보통 한두 시간 작업한다는 그는 마음 내킬 때, 시간이 날 때 일하는 게 최고라며 웃음을 지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서 ‘스펙’을 쌓아야 할 것 같은 대학생들에게 그는 ‘빈둥거림’의 즐거움을 전한다.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저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에요. 그것만큼 귀중한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그 시간에는 무엇을 해도 좋은데, 사실 무얼 하느냐 하면 아무것도 안 해요. 그저 빈둥거리고 놀 뿐이죠. 그저 우두커니 있다는 게 아니라, 그 순간순간에 하고 싶은 걸 하는 겁니다. 책을 읽고 싶으면 책을 읽고, TV를 보고 싶으면 TV를 보고••• 얼마나 즐거워요!

TV를 보고 싶으면 TV를 본다는 그의 말은 취미도 ‘찾아서’ 그럴듯하게 만들어내는 요즘 시대에 정곡을 찌르는 듯하다. 소소한 마음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그 순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충실한 그의 모습에서는 여유가 선사하는 미덕을 발견할 수 있다.

서두르지 맙시다. Live Slowly! 우리 세대는 인간답게 살기 시작하는 나이가 30세부터였어요. 그전까지는 온전히 개인의 삶이 아니었죠. 20대 초반에 군대를 갔다 오면 스물다섯 즈음에 졸업하고, 다음 해에 취업해서 서른 전에 결혼하고••• 정해진 나이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였죠. 하지만 요즘은 그때 보다 자유롭잖아요. 20세부터 80세까지 자유롭고 건강하게 사니까, 절대인생이 우리 세대의 두 배인 거죠. 그러니 대학을 4년 만에 졸업해야 할 필요도, 서른 전에 꼭 취업해야 할 필요도 없어요. 여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돌아보는 게 중요하죠.

그의 인생이 즐거운 것은 그가 베스트셀러 작가여서도,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인생을 살아서도 아니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몸을 맡긴 채 느긋하게 그 탄성을 즐기며 지내 온 결과이다. 그는 40년 이상을 한결같이 만화와 함께 해왔지만, 지겹기는커녕 즐겁기만 하다. 이제야 그의 미소의 의미를 알았다. “바로 지금을 즐겨!”라는 의미를 대변한다는 것을.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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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 정말 즐거워 보이시네요 ~~ ㅋㅋ 멋져요!
  • N

    외국 여자친구도 많았다며 자랑스럽게 웃던 얼굴이 떠오르네요 아아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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