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제본가

어린 시절 매일같이 읽던 동화책, 우리 할머니의 옛 사진첩, 10대의 추억이 새록새록 담긴 일기장•••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당신의 소중한 책들이 세월을 겪으며 찢기거나 바래버렸다 해도 낙담할 필요 없다. 책을 ‘재탄생’ 시키는 해결사, 예술 제본가가 있으니.

책에 영생을 부여하다

예술 제본가의 기본적인 업무는 헌 책을 보수, 복구하는 것이다. 책의 헐고 망가진 부분을 단순 수선하는 작업에서부터 낡은 책을 완전히 새로운 책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에 이르기까지 고객의 의뢰에 따라 업무의 영역이 넓어진다.

예술 제본가는 중세 시대 유럽에서 탄생한 직업이다. 고위성직자나 신분이 높은 계층들이 누리던 고급문화였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대중화되었다. 역사가 있는 유럽에서는 이미 예술제본가가 하나의 직업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며, 이웃 나라 일본 역시 약 50년의 예술제본 역사를 자랑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예술제본 문화가 도입된 것은 불과 10여 년 전이다. 전 세계적으로 예술제본가가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나라는 스위스, 벨기에, 프랑스가 있다.

한 권의 책을 예술로 승화시키기까지, 그 인내의 과정

보통 예술제본가는 개인 작업실(공방)을 차리고, 고객이 공방을 찾아와 책을 보수하거나 제작하는 등의 주문을 받는다. 그들은 일단 의뢰한 목적과 책의 가치와 용도, 출판 시기 등을 모두 감안하여 사용할 재료와 보수 방법을 정한다. 가령 동네의 도서관에서 대량으로 들어온 의뢰라면, 책의 커버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인 저렴한 천을 사용한다. 반면, 그보다 가치가 높은 책이라 판단되면 커버 재료로 비싼 가죽이나 종이를 선택하는 식이다.

골동품에 가까운 몇 세기 전의 책에 대해 보수 의뢰가 들어오면, 예술제본가들은 보통 책을 최대한 원본에 가깝게 복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원본의 재료와 비슷한 종이와 가죽을 구해 헤진 곳을 수리하고, 색감을 새롭게 입힌다거나 하는 방법으로 책을 산뜻하게 분장한다. 옛날 책은 출판된 세기마다 종이나 문양이 달라서 그들은 책과 종이의 역사 같은 이론적 부분도 완벽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반면 현대 서적들을 제본할 때는 태도가 다르다. 딱히 정형화된 양식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 제본가의 안목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 복원할지를 결정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술제본가 저마다의 개성이 특히 도드라지는 분야이기도 하다. 예술제본가는 의뢰인이 생각하는 이 책의 가치가 어느 정도이고, 얼마나 자주 열어보는지, 또는 책의 스타일은 어떤지 등을 면밀히 파악해 제본 재료부터 꿰매는 방법까지 자유롭게 구상한다. 재료는 예술제본가가 직접 만들 수도 있고 재료상에서 구입하는 경우도 있다. 금박을 입히는 법을 마스터한 예술제본가는 금박을 이용해 화려하게 글씨를 새기기도 한다.

예술 제본가는 책의 종이가 해어지거나 색이 바랬다면, 종이를 원상 복구시키는 작업에 착수한다. 종이를 한 장씩 일일이 물에 담가 때를 지우는 작업을 하거나 지우개로 정성껏 지운다. 종이의 때가 어느 정도 빠지면 말린다. 다 마르면 용약 처리를 해 종이를 빳빳하게 편다. 종이가 뜯어져 있다면 비슷한 종이 색깔을 골라 만들거나 붙이기도 한다. 이렇게 세심하게 종이를 다듬고 나면 강력한 풀로 붙여서 다시 책으로 만든다. 다음은 풀이 마르기를 또다시 기다린다. 책 한 권을 재탄생시키는 작업이 이렇듯 길고도 험난하다니. 길면 몇 달까지 걸리는 작업을 감당할 수 있는 인내심이야말로 예술제본가의 필수적인 자질이 아닐 수 없다.

한국 VS 프랑스, 예술 제본가가 되려면

우리나라에는 예술제본이라는 문화 자체가 온전히 자리 잡지 못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에서 예술제본가가 되기란, 개척자가 된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예술제본가의 공식적인 자격증 코스는 마련되지 않았다. 예술제본을 가르치는 기관은 국내 1호 예술제본가인 고 백순덕 선생이 문을 연 공방 렉또베르쏘 정도. 하지만, 해외로 눈을 돌린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가령 세계적으로 예술제본이 가장 발달한 나라인 프랑스는 현재 1천8백여 명의 수공업 예술제본가들이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책을 바라보는 국민의 전반적인 의식 수준이 높아, 예술제본가가 받는 주문 중 개인적으로 의뢰하는 경우가 40%에 육박한다.

프랑스에서 예술제본가가 되는 방법은 다양하다. 이는 기술직에 속하기 때문에, 별도의 자격증을 갖추지 않아도 실력만 있다면 누구나 이 직업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이들은 본인의 실력을 인증할 수 있는 수단으로 학교 졸업장이나 자격증을 딴다. 프랑스에는 예술제본 기술 국립전문학교는 2년 과정의 ‘똘비악(Tolbiac)’과 ‘에스티엔느(STN)’, 두 가지가 있다. 다만 입학할 때 똘비악은 24세, 에스티엔느는 26세까지의 나이제한이 있다. 하지만 똘비악은 성인반 과정이 따로 준비되어 있어 누구나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열었다. 에스티엔느는 예술제본 계의 최고급인 학교로, 따로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야 할 뿐 아니라 입학시험도 치르는 등 입학할 때 까다로운 편이다. 이 두 가지 학교에 입학하는 것 외에 ‘쎄아뻬(CAP)’라고 불리는 전문 작업 기술직 시험 자격증, 즉 예술제본가 자격증을 따는 방법도 있다. 이를 따려면 언어와 사회과학 전반에 대한 학습수준을 테스트하는 일반시험도 통과해야 한다.

Mini Interview 프랑스 유일의 한국인 예술 제본가, 이보영의 예술 제본가 탐구

프랑스 파리를 주무대로 활발히 활동하던 이보영 예술 제본가. 예술제본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그 꽃을 피우고 싶어 얼마 전 귀국했다. 이제 곧 ‘보영 리 아틀리에’의 주인이 될 그녀가 말하는 책과의 인연, 그리고 예술 제본의 미래.

럽젠Q : 예술제본가란 직업은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나요?

원래 저도 예술제본가라는 직업 자체를 몰랐어요. 미대를 졸업할 시기가 다가왔는데도, 아직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진로를 정하지 못한 상태였어요. 그래서 동아리를 통해 배운 불어 실력과 막무가내로 프랑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붙들고 1년간 어학연수를 떠났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파리 시청에서 운영하는 예술제본 강의프로그램에 대한 카탈로그를 접하게 됐어요. 프랑스는 동네마다 공방이 있어서 주소만 보고 찾아가기 쉽거든요. 그때 옛날 모습 그대로 책을 복원하고 만드는 공방 사람들의 모습에 문화충격을 받고 매료되었어요.

럽젠Q : 타국인 프랑스에서 예술제본을 배울 때 힘들었던 점은요?

저는 예술제본전문학교인 ‘똘비악’을 다녔어요. 보통 이곳 학생들은 자기발전을 위해 인턴으로 일하면서 실무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스스로 찾아 나서죠. 저도 일거리를 구하려고 나서는데, 처음엔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안 오더라고요. 너무 힘들었죠. 무작정 공방을 방문하기도 하고, 이리저리 주선을 받아 전화도 걸고••• 그러면서 3~4곳의 공방에서 2년 동안 인턴 일을 할 수 있었어요. 뭐든 부딪혀보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럽젠Q : 프랑스의 예술제본 문화는 어떤가요?

프랑스는 같은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들끼리의 교류가 굉장히 활발해요. 워낙 개방적이라 신기술을 개발해도 동료 예술 제본가들에게 솔직히 털어놓죠. 인맥 역시 잘 형성되어 있어서 서로 잘 돕고 우호적이에요. 흔히 프랑스 사람들이 까다롭고 개인적이라고 말하지만, 전 그런 건 못 느꼈어요. 또 동양인에게 폐쇄적이라거나 하는 건 다 선입견인 듯해요. 일본은 이미 4~50년 전부터 프랑스로 유학을 와서 예술제본을 배웠잖아요.

럽젠Q : 앞으로 한국 예술제본가의 전망은 밝을까요?

제가 한국에 도착해서 서울 시내 도서관을 비롯해 이곳 저곳을 다니며 “책들이 헤어지거나 망가지면 어떻게 관리하세요?”라고 물어봤어요. 그런데 답변이 “그냥 테이프 붙이고•••”라며 우물쭈물하시더라고요. 프랑스는 국공립도서관이나 사립도서관에서도 공무원 자격으로 국가 책을 제본할 수 있도록 예술제본가를 두고 있어요. 제 생각에는 한국도 예술제본의 수요는 충분해요. 아마 우리도 알게 모르게 수천 년 동안 복원되지 못한 책이 도서관 창고 어딘가에 박혀 있을 거예요. 이제부터 한국도 다른 나라의 좋은 문화를 본받아서 인식의 변화가 생기도록 열심히 유도해야겠죠.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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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산 책인데 첫페이지를 잘못펴서 쩌억 하고 갈라졌을 때, 밀려오는 그 허탈함. 그럴 때, 이분들이 필요하겠군요!
  • 황경신

    진짜 멋있는 직업이죠? 그냥 예술가라고 하면 왠지 남일처럼 멀게 느껴지는데, 우리 일상적인 삶과 가까운 책을 다루는 직업이라서 더 와닿았던 것 같아요. 저도 제본 배워보고싶더라고요 노후직업으로 삼고 싶어요 ㅋㅋ
  • 으헣

    맞아요 !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나왔었죠 ㅎㅎ
    그때 참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멋져요!
  • 야구박사신박사

    황기자님하고 잘 어울리는 직업 같은데요? ^^
    참고로 기사상의 "럽젠Q"는 제가 질문한거 절대 아닙니다~
    아이디가 공교롭게도 동일해서리 혹시나 오해하시는 분이 계실까하는 기우에서 말씀드립니다~ ^0^
  • 파매

    정말 세상에는 다양하고 흥미로운 직업이 많군요
    우와
  • 뿌리다

    아, 영화 <광식이동생광태>의 김아중 직업이었네요. 꼭 우리나라에도 이 직업이 안정화되었으면 좋겠어요 .흐
  • 삼다

    와 정말 멋진 직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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