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상상력] 서사-소설적(II)_1

 
 
 
 
  <오딧세이>의 고전적 영향력을 가장 끈질기게 또 현대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일랜드
소설가 조이스의 1922년 작품 <율리시스(Ulysses)>(오디세우스의 로마명)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이야기를
해체하고 새로운 소설-이야기의 장을 연, 20세기 최고의 걸작소설로 평가받지만, 내용은 물론 미학 사상에서도 일리아드의
오딧세이화를 이으면서 동시에 현대화한다. <율리시즈>는1904년 6월 16일 아침 일찍부터 그 다음 날 새벽
2시 30분 경까지의 더블린 일상을 다루고 있다. 원래는 소설집 <더블린 사람들>에 수록할 단편으로 구상되었는데,
집필하는 동안 물경 767쪽의 방대한 ‘현대 서사시’로 발전해갔다. 실제 벌어지는 이야기 자체는 매우 단순하다.
스티븐 데덜루스는 파리에서 공부를 하다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더블린으로 돌아왔다. 그는 죄의식에 시달리는 한편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무척 강해서 ‘무릎 꿇고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는 어머니의 청을 거절한다. 앞부분 세 에피소드는
그가 집이 있는 마텔로탑에서 아침을 먹고 디이지씨 학교에서 역사를 강의하고 샌디마운트 해변을 걷는 얘기다.
 
이어지는 에피소드 12편의 주인공은 레오폴드 블룸.
그가 바로 율리시스다.
그는 에클레스가에 위치한 자기 집에서 아침을 먹고, 글래스네빈 묘지 장례식에 참석하고,
신문사에 들르고, 데이비 번스 술집-레스토랑에서 술 한잔 마시고 도서관에 들른다. 거리를 헤매다가 총독 호위 기마행렬과
마주치며 오먼드 퀘이 호텔에서 음악을 듣고 바아니 키어난 선술집에서 한 시민과 말다툼을 하고 해변에서 거티 맥도웰과 새롱거리고
나서 산부인과 병원에 들른다. 그리고 거기서 마침내 데덜루스를 만난다. 이때 비로소 데덜루스는 텔레마코스다. 둘이 함께
벨라 코헨 유곽을 경험하는 것이 에피소드 마지막 편이다. 이어지는 에피소드는 모두 세 개. 그렇게 처음의 에피소드들과
균형을 이룬다. 블룸과 데덜루스는 마부 오두막에 있다가 에클레스 가로 돌아온다.
세번째 에피소드 장소는 침대. 몰리 블룸의 에로틱한 회상이 전개된다. 첫 부분은 주로 데덜루스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
중간은 레오폴드 블룸의 의식 흐름 안팎을 오간다. 그는 자기 아내의 부정(不淨)에 집착한다. 마지막 부분은 온전히 블룸
부인의 의식 속이다.

전체적으로, 광고회사 직원 블룸이 신문사를 방문하는 것은 <오딧세이>
원전 바람의 왕 에올로스 궁전 에피소드에 병행한다.
그리고 현대판 텔레마코스인 데덜루스는 동시에 그리스 신화의
예술가이고, 그가 아버지를 찾는 방황은 예술가의, 예술의 방황에 다름 아니다. 블룸 부인의 침대 속 에로틱한 불륜 회상은
페넬로페의 수의 짜기와 겹쳐진다. 그렇게 고대 그리스 오디세우스의 파란만장한 모험이 현대의 일상-가정사 속으로 심화한다.
영웅이 사라지고 일상이 불안으로 복잡-정교해진다. 삶이 난해해지고, 일상의 결이 신화보다 의미심장해진다.
<율리시스>는 역사상 최고 수준의 소설 미학과, 주인공 내면 의식의 흐름을 ‘사실주의적’으로 반영하는 새로운
기법을 하나의 총체로 아우른다. 아니 소설의 성(聖)과 속(俗)이 총동원되면서 새로운, 현대의, 미완(未完)의, 미완으로서
총체를 이룬다. 병원 장면에서 그는 영국문학의 대가들을 패러디하고 있다. 그의 붓이 마치 카메라처럼 움직이며 짧막짧막한
장면들을 파노라마로 찍어낸다. 어떤 장(場)은 통째로 교리문답 같고 거티 맥도웰 부분에서는 감상적인 3류 소설들이 패러디된다.
그리고 벨라 코헨 부분은 연극과 영화 효과를 총동원, 술취한 도시 야경을 생생하게 재현해내고 있다.

그렇게, 이야기의 이야기가 이야기를 압도한다. 미학 기법이 줄거리를 압도한다.
좀더 나가면 시간-공간 개념과 함께 이야기가 해체되고 소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마저 소멸되고 형식이
형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마저 소멸될 것이다. 이야기가 해체되는 이야기도 소멸될 것이다. 그 끝을 향해 우리는
다가가고 있다. 소설은 결국 소멸될 것인가?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에 집착한다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이야기의
이야기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야기(의 이야기)의 소멸은 거대한 희망일 수 있다. 호메로스는 눈 먼 음유시인이었다.
그의 ‘서사시=예술’은 눈 먼 자에게만 보이는 진리였다. 호메로스 자신에게 ‘문학-예술(서사시)’은 무엇이었을까? <오딧세이>
4권에서 메넬라오스는 텔레마코스에게 자신의 이상한 귀환 이야기를 해준다. 그것은 오디세우스의 <오딧세이>를
위한 메넬라오스 삽화 혹은 귀환론이라기 보다는 <오딧세이>의 배경으로서 호메로스 자신의 (서사시)예술론에 가깝다.
즉 ‘이야기의 이야기’에 가깝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메넬라오스는 귀향 도중 이집트에서 발이 묶였다. 그가 바친 번제물이
충분치 않다고 판단한 신들이 바람을 보내주지 않았던 것. 신들은 늘 욕심이 많아서 제대로 챙겨줘야 하는건데… 그는 텔레마코스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를 도와주는 것은 바다 요정 에이도테아. 프로테우스의 딸이다. 프로테우스는 누군가. 포세이돈의 신하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일까지 모두 아는 ‘바다의 노인’이다. 그의 자문을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우선 그가 몰고
다니는 포세이돈의 물개 떼 악취가 너무 지독해서 접근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 그리고 프로테우스는 어떤 형태로든 변할 수
있다.
깜짝 놀래키며 몸을 꽉 붙잡은 후 끝까지 놓지 마시라… 이도테아는 메넬라오스에게 향이 진한 암브로시아를 주면서 그렇게
요령을 알려주었다. 메넬라오스가 물개로 변장하고 프로테우스에게 접근하는데, 암브로시아 향에도 불구하고 물개 떼 냄새가
지독했지만 그는 가까스로 참고 다가가 덜컥, 프로테우스를 움켜 쥐니 프로테우스는 사자로, 용으로, 표범으로, 곰으로,
다시 얇은 물막(膜)으로 또 가지가 높은 나무도 변한다. 메넬라오스는 끝까지 그를 놓지 않고 마침내 프로테우스가 기진맥진하여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메넬라오스가 묻는다. 어떻게 해야 집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프로테우스의 답은? 이집트로 돌아가서
신들에게 번제물을 더 바쳐라… 정말 어이없는 답이다. 그건 메넬라오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 아닌가!
멍청한 메넬라오스? 그러나 호메로스는 결코 멍청하지 않다. 프로테우스 자신은 예술의 질료 혹은 매질이다. 깜짝 놀래킴의
시적 통찰을 통해 예술의 질료가 형상화한다. 프로테우스는 단순히 험악한 동물로만 현상화되지 않는다. 물막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미세한 것으로도 변하고 그것을 끝까지 포착하기는 더 힘들다. 메넬라오스는 쓸데 없는 짓을 한걸까? 쓸데 없는 짓,
즉 예술창작 행위는 실용적 진실(귀향 방법)에 아무 소용 없지만, 무형의 질료에 세계의 형상을 가하는 원동력이다. 그리고
어쨌거나, 메넬라오스는 ‘신의 도움을 받은’ 쓸데 없는 짓을 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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