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종단기]제22화 비자 없는 세상을 자유롭게 여행하고 싶다.

    “세계 코카인 시장의 80%를 공급하는 나라.
세계에서 3번째로 큰 마리화나와 헤로인을 생산하는 나라. 정부에 대항하는 게릴라들로 인해 테러가 끊이지 않는 나라. 마피아가
의회에 진출하고 마약 수출로 벌어들이는 돈이 전체 GDP(국내총생산, Gross Domestic product)의 55%를
넘기는 나라.”
콜롬비아를 악명 높게 만드는 수식어들. 그래서 여행자 사이에서 콜롬비아는 가서는 안되는 나라 우선순위에 들게 되었다.
얼마 전 신문에 났던 ‘보고타 폭탄 테러 사진’이 떠올라 바짝 긴장이 되었던 탑승 전과 달리, 비행기에 올라타니 언제
그랬냐는 듯 맛없는 기내식에도 행복해 하며 먹을 것 챙기기에 정신없다. 1시간 20분이 후딱 지나가 드디어 콜롬비아다.
 
공항에서 밖을 슬쩍 내다 보니 무채색의 콘크리트 건물들과 두꺼운 코트를
입고 서 있는 무채색의 표정없는 사람들로 왠지 모를 우울함이 전염되는 듯 했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감싸 도는 차가운 공기.
무얼 탈까 고민을 하다 결국 센트로까지 버스를 탔다. 이어지는 황량하고 냉랭한 느낌들. 그 위험하다는 센트로에서 어떻게
숙소까지 갈까 암담해 하고 있는데, 버스에 동승했던 한 아저씨가 힐끗 주소를 보더니 자기를 따라오란다. ‘괜히 막무가내로
따라갔다 이상한 데로 끌고 가면 어쩌지?’ 갑작스런 친절에 고마운 생각보다 의심부터 나기 시작했다. 걱정 반 기대 반
그를 따라 한참을 걷는다. 아저씨는 골목골목 깊숙한 곳의 우리 숙소까지 데려다 주곤, 좋은 여행 하라며 인사까지 하고
떠났다. 아! 어쩌면 콜롬비아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괜찮은 나라일지도 모른다.
언뜻 콜롬비아는 중앙 아메리카보다 적도와 가깝지만 2,500m의 고도 덕에 한국의 가을 같이 평균 12℃를 유지하여 살기
적합한 곳 같다. 하지만 조금만 걸어도 공기 부족으로 숨이 벅차 오른다. (그렇지만 보람은 있다. 왜냐? 조금만 걸어도
한바탕 뛴 것과도 같은 운동 효과 때문이다.) 고도 적응도 할겸 센트로를 돌아보고 있는데 색깔 없이 모던하게 서 있는
큰 건물 사이를 누비는 세련된 선남선녀들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찌나 다들 예쁘고 잘 생겼던지 이제껏 보아 왔던 중미의
원주민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좀더 유럽의 피가 섞였다고나 할까.
사람 구경, 값싼 음식에 신이 났다. 콜롬비아에 관한 여행자 사이의 그 모든 소문들이 루머였던 것일까. 다시 버스를 타고
숙소까지 가는데, 무장 군인들이 길거리의 구두닦이들이나 노숙자 같은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다가 군인 트럭에 싣고 있다.
지나가는 청년들을 벽에 손을 대고 돌아서게 한 채 몸 수색도 한다(우리나라 군부 독재 시절의 불심검문 같다).이런 살벌한
풍경 너머 다 부서져 버린 집들 사이로 수많은 노숙자들이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했다. 센트로에서 약간만 벗어나면 볼 수
있는 처참한 풍경들. 그래도 우리의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를 콜롬비아로 오게 만든 99%의 이유는 에콰도르 비자를 받기 위해서였다. 오늘도 대사관을
찾아가는 길. 각종 서류로 중무장을 하고 나름대로 옷차림도 신경 쓴다. 언제나 주택가 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한국
대사관 찾기는 초반부터 진이 빠지기 마련이다. 어, 책상을 마주앉아 있는 담당자는 인상 좋아 보이는 아저씨다. 우리 얘기에
상냥한 웃음과 함께 에콰도르 지도와 안내문 두 장부터 척(!) 내주는 게 아닌가. 이거 잘 풀릴 조짐 아냐?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요구되는 사항만 9가지에 그 세부사항들은 더욱더 기가 막힐 뿐이다. 기본서류는 물론 DAS서류,
건강진단서, 에이즈 감염 여부 증명서, 이상한 예방 접종 2개 등 이 모든 것들을 위해 드는 돈만 200(US) 달러가
넘는다. 에콰도르라는 조그마한 나라를 여행하는 데 드는 총경비를 뺨치고도 넘는 돈과 각종 증명서류를 위해 투자해야 하는
시간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큰소리도 쳐보고 애걸복걸, 애교작전까지 동원, 결국 DAS서류와 에콰도르 출입국 왕복 항공권은
필요 없어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진전은 없다.
대사관을 나와 막무가내 근처 병원들을 찾아다니는 데 문득 서러워졌다. 서구 여행자들에겐 하나 필요 없는 이런 증명서들이
왜 우리에게만 필요할까. 병균들이 우리들한테만 따라다니는 것도 아닌데. 병원 6군데를 돌며 물어본 결과 돈도 돈이지만
에이즈 감염 증명서만을 위해서 8일이 걸린단다. 결국 이튿날 다시 대사관을 찾아가서 실갱이를 벌인지 30분쯤 건강증명서와
에이즈 감염 증명서는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이제 남은 건 이상한 2가지의 예방접종. 우리가 지금 콜롬비아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도와 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더 이상의 졸라서 해결되지 않을 듯. 어쩔 수 없이 돌아서는데 또
다시 밀려오는 서러움.
이 머나먼 타국에서 알지도 못하는 예방접종을 2개씩이나 맞아가며 에콰도르를 꼭 가야 하나. 차라리 이 돈으로 페루행 비행기표를
사서 편하게 페루로 날아가 버릴까. 그러나 어쩌랴? 안 된다고, 어렵다고 하면 할수록 오기가 돋는 이 성질을! 우리가
누구인가! 그 모든 여행자들이 콜롬비아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갈 때 유유히 콜롬비아로 날아간 사람들이다. 솔직히 생략해도
별 타격 없는 에콰도르가 이제는 꼭 가야 할, 가지 않으면 큰일날 곳으로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다.
병원으로 향했다. 더 이상 콜롬비아는 이런 예방접종이 필요하지 않다고 대사관을 비웃는 의사 앞에서 맘껏 에콰도르 대사관을
욕해주었다. 두 가지 예방접종을 한 번에 맞아도 괜찮냐고 물어보니 괜찮단다. 더 엽기적인 건 두 예방약을 하나로 섞어서
한 번에 맞았다는 것! 의사가 대충 휘갈겨 쓴 증명서 한 장에 45달러(US)를 지불하고 대사관을 향해 달렸다. 나머지
모든 서류에 예방접종 증명서 한 장 얹고 80달러(US)를 내니 내일 여권 찾으러 오란다(서류에는 60달러였는데, 1달러
당 기본 환율 2,500페소를 무시한 채 3,300페소로 계산했다. 20달러를 먹겠다는 고약한 심보! 그러나 어쩌냐.
우린 힘이 없다).
총 125달러(US)로 미국 비자보다 더 비싼 에콰도르 비자를 따냈다. 3일간의 신경전에 온 몸이 탈진 상태지만 기분만큼은
후련하다.


그래! 에콰도르야! 우리가 너를 천천히 감상해 주마!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예방접종의 정체는 ‘홍역’이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그깟 예방접종 없이 에콰도르에 건너갔을 텐데.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다)
 
  보고타에서의 일주일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비자만 따면 금새 떠나리라 맘 먹었던 보고타에,
우연히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만난 영국인 하얏트와 에콰도르인 미르따 부부 때문에 하염없이 머물기도 하고, 호스텔의 좋은
사람들 덕분에 하릴없이 집같이 편한 호스텔에 하루종일 앉아 게임하고 놀고.
여유로움을 며칠 만끽하니 또 다시 들이닥친 사건 하나. 정말 좋은 친구로 생각했던 하얏트와 미르따 부부는 알고보니 여행자들
상대로 사기를 치며 다니는 사기꾼들이었다. 은행 계좌에 문제가 있다며 월요일에 은행에서 돈을 찾은 뒤 돈을 돌려주겠다며
20달러(US) 만 빌려 달라는데 속아 이들 부부와 친했던 유스텔 사람들 대부분이 돈을 빌려줬었다. 에콰도르 국경에서
만나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에 있는 자기집에 같이 가자며 만날 시간 약속까지 했었다. 처음엔 에콰도르 대사관에 아는 사람이
있어 우리가 낸 수수료를 돌려 받아 주겠다, 키토 자기 집에서 마음껏 머물러라 등등 우리에게 너무 친절하게 이것저것 신경
써주길래 어느 정도 조심해야 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임신 중인 미르따와 함께 지낼수록 이들의 따뜻한 호의를 의심한
우리가 되려 미안해질 정도였었다. 돈을 빌려줄 때도 200달러가 아니라 20달러인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돌려받지 못해도
마음을 비우자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결국 메일을 보내도 아무런 답장이 없자 처음 예감이 역시 틀리진 않았구나 싶다.너무 가슴 아픈 건 잃어버린 20달러가
아니다. 마음 깊이 좋은 친구라 여겼던 두 명의 친구를 잃었다는 사실. 이런 자잘한 사기와 거짓말들이 미르따의 뱃속 아기에게
얼마나 나쁜 영향을 끼칠지 그들은 두렵지도 않았던 것일까.


비온 후 땅이 굳는다는 옛 말처럼 콜롬비아를 여행하고 나니 한층 더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친구를
사귀는 건 좋지만 조심해야 한다는 것. 이 소중한 교훈을 안고 많은 일들이 있었던 콜롬비아를 떠나 에콰도르로
향하는 길. 고원의 산들과 들판들이 한 가득 펼쳐지는데 다시 여행하는 즐거움이 밀려온다. 그래 누가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했던가. 우리는 또 다른 인생을 경험하고 배우러 이렇게 계속 계속 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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