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종단기]제18화 침략, 독재, 미국이라는 단어와 밀접한 중앙아메리카

   
  우리나라에서도
시골보다는 서울에서 범죄가 더 많이 발생하듯. 이곳 중미의 각 나라 역시 수도나 대도시는 치안 상태가 많이 불안하다.
먼저 우틸라를 떠난 친구들이 니카라과의 그라나다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그라나다까지 한 걸음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야간버스라는
것 자체가 없을 뿐더러 야간 버스를 탄다는 것은 곳곳에 숨어 있는 무장 강도와 게릴라로부터 자신의 여행운을 시험해 보는
것과 같은 일과 같아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어쩔 수없이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구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그라나다로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온두라스의 수도 테구시갈파에서부터 버스를 타고 마나구아에 도착, 터미널을 나서는 순간 보이는 황량한
분위기에 갑자기 암담함이 엄습한다. 더군다나 해까지 저물어 어둑어둑해진 상황에서, 난생 처음 숙소 호객군의 뒤를 따라
버스터미널 근처에 방을 잡았다.
 


 
중앙 아메리카 각 나라들의 불안정한 사회와 경제상황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물론 스페인의 경제적 약탈과 사회적 억압이 근본 이유가 되겠지만, 그 이후로 경험하게 된 내전과 독재자의 횡포,
미국의 간섭 등이 결과적으로 지금의 중미의 상황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 일제침략기 이후로의
역사와 많은 공통점을 가진 이 나라들에게서 친밀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물론 그 시대적 상황과 상이한 민족성으로
인해 현재의 모습은 현저하게 차이가 있지만, 현대사를 통해 침략과 독재, 미국이라는 단어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점은 태평양을 사이에 둔 멀기만 한 두 나라를 새삼 신기하게 느껴지게 한다.

우리와는 다른 민족성이라고 느껴지는 가장 큰 점은, 길을 가다 다른 모습을 가진 우리에게 열렬한 호응을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이라고나 할까. 대개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인을 보더라도 똑바로 쳐다보는 대신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그 생김새의 다름을
즐기는 경향이 있지만, 이곳 사람들의 태도는 완연히 다르다. 얼굴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자기들끼리 낄낄대며
휘파람을 불면서 ‘chinita!'(중국인을 의미하는 에스파니아어: 이 곳에는 정말 많은 중국인들이 작은 잡화점부터 음식점까지
상권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bonita!'(조금 민망하게도 ‘예쁘다’라는 뜻이다)를 외쳐대며 지나가는 우리를
붙잡는다. 또한 아이 셋 딸린 젊은 이혼남에서부터 늙은 할아버지들까지, 자신의 화려한 경력을 아무렇지 않게 펼쳐 보이며
우리에게 접근하려는 의도를 보일 때마다 그 말들을 장난으로 넘기며 무시하기가 얼마나 힘들던지…(때로는 정말 한국에서 결혼했다고
하고 결혼 반지라도 하나 끼고 다녀야 하나… 아니면 어린 조카 사진이라도 하나 들고 다녀야 하나.. 라고 생각할 정도다)
라틴 문화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사교성이 좋고 낯선 이들에게 어려움 없이 대한다는 점은 좋지만, 때로는 도가 지나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게다가 음식을 주문해면 너무도 한참 후에나 음식을 가져다 줄 때, 버스 매표소에서 버스 티켓을 발행할
생각은 않고 자기들끼리 노닥거릴 때, 정말 그들의 너무나도 느긋한 성향에 할 말을 잃곤 한다. 하지만 이 모든 다름이
자신들만의 독특한 정열이 깃든 라틴 문화를 화려하게 만들어 내는 것이니, 이 다름의 맛을 즐겨 보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다.



 
우리의 여행지 중 최악의 도시로 꼽을만한 마나구아를 벗어나 그라나다에 도착하니, 식민지시대풍의
집들로 인해 도시 전체가 화사하고, 공원에는 산책 나온 가족 단위의 사람들로 가득하다. 마나구아에서 그라나다로 가는 콜렉티보에서
만난 모녀 아수세나와 블랑까는 이곳 니카라과에서 살다 멕시코로 이주한 교포로, 20년 만에 다시 모국을 여행하러 왔다고
한다. 그라나다에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던 친구들도 보이지 않고, 아수세나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큰 관심을 보여서 오늘
하루는 이 모녀와 같이 그라나다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아수세나 아주머니는 성격 한번 화끈하다. 시종일관 우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우리가 넉살 좋게 받아 치면 걸걸하게 웃어 젖히는 완연한 라틴 아줌마다. 니카라과 전통 음식인 미고롱(감자와
고구마의 중간형태인 ‘유까’ 위에 돼지 껍데기 튀김인 ‘치차론’을 올린 것에, 양배추를 듬뿍 올리고 상큼한 소스를 더해
바나나 잎에 담아내면 끝!)과 카카오까지 사주신 후, 마나구아에 살고 있는 동생의 몸이 좋지 않아 오늘 서둘러 돌아가야
한다고 하신다. 도둑 조심, 몸조심을 신신당부하고, 서로의 주소와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에스파니아어로 쓴 엽서를 한국으로
보내겠다고 할 정도로, 우리의 헤어짐은 아쉽기만 했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또 흔드는 우리 역시,
여행중의 예상치 못했던 잠깐의 만남으로 마음 훈훈해져 온다. 이런 것들이 여행의 묘미이고, 늘 가슴 가득 느끼려고 하는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아수세나 모녀랑 헤어지고 주변을 둘러보니, 마침 일요일이어서 가게들은 온통 문을 닫았고, 마땅히 할 일도 없다. 지나가다
보인 극장에 <오스틴 파워 골드 멤버>가 한참 상영중이길래 영어 상영이냐고 물어봤더니 그렇단다. 북미를 여행할
때, 이 영화를 보려고 길 한 가득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을 봤던 터이고, 가격도 우리나라로 환산하면 천 원 정도이니
아주 만족스럽다. 아~ 간만에 문화생활이나 해볼까. 그러나 극장에 모인 전체 인원이 우리까지 합쳐 10명. 큰 선풍기가
열심히 돌아가는 극장 안에서 유치 찬란한 이 영화를 1시간 반동안 보고 나오니, 눈만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간 다시 만나지겠지’라며 친구찾기에 대한 미련은 버렸다. 그리고 다른 여행자로부터 전해
들은 태평양 연안의 마을 산 후안 델 수르로 서핑하러 떠났다. 그라나다에서부터 교통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리바스까지
이동한 후, 리바스에서부터 산 후안 델 수르까지 택시로 30분을 달렸는데, 택시비는 겨우 천 원이다. 이곳 중미에서 운행되는
택시의 대부분은 한국에서 들여온 중고차(보이는 차의 90%가 현대의 엑셀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간혹 차창에
적혀 있는 ’15인승 봉고’, ‘엑셀’ 등의 문구를 보면 어찌나 반갑던지….

산 후안 델 수르에 도착, 유스호스텔에서 서핑하러 모인 10명의 사람들과 보드를 대여하고 트럭 한 대까지 빌려 타고 1시간
거리의 해변으로 출발했다. 우띨라 섬의 잔잔하고 파랗던 바다와는 너무 대조적인 2m 높이의 파도가 연실 잡아 먹을 듯
덮쳐 오는 바다 앞에서 과연 우리의 첫 서핑은 어찌될는지 안 봐도 훤하다. 역시나 좀 깊은 곳으로 가고 싶은데, 파도
한 번 치면 파도에 떠밀려서 제자리로 돌아와 있고 앞으로 나아가기조차 힘들다. 겨우 조금 깊은 곳으로 갔더니, 서핑보드보다
한 단계 쉬운 부기보드를 빌려서 타는데도 큰 파도 한 번 치면 뒤집히고 보드에 매달려서 허우적대고… 영화에서 보던 파도를
가르며 멋지게 보드를 타는 모습은 우리 일행 중 누구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서핑 다음날 역시나 쑤셔오는 온몸을 안고 오메테벡 섬으로 출발. 멋진 노을을 보기위해 찾아간
작은 호숫가의 끄트머리에 앉아, 마지막 지는 해의 강렬한 햇빛을 온몸에 받으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다가 정신을
차려 주변을 둘러보니 해는 어느새 호수 너머로 지고 주변이 어둑어둑하다. 6시에 큰 길가에 마지막 버스가 있다는데, 큰
길가로 나가는 오솔길에서 이미 날이 어두워져 한치 앞을 볼 수 없다. 서둘러 갈 길을 재촉하는데, 유난히 까만 흙이 잔뜩
있는 길에 반짝반짝 초록 불빛이 한가득 보인다. 도깨비 불이 아닌가 싶어 자세히 쳐다보니, 온길 가득 반딧불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반딧불의 반짝거림, 이름 모를 풀벌레들 소리와 함께 달조차 뜨지 않아 전혀 보이지 않는 길을 감각만으로
더듬거리며 헤쳐 나가 큰 길가에 도착하고 보니 버스가 과연 올지 의심스럽다. 기다리고 있는 게 더 위험하다는 생각에 무작정
아까 왔던 길을 더듬어가며 마을로 향하는데 걸어도 걸어도 마을은 보이지 않고, 가로등 하나 없이 캄캄한 숲길을 반딧불
빛에 의존해서 걸어가자니 이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도, 불야성 같은 도시에서 자라난 우리 두사람의 입에서는 ‘인생에 더
없이 소중한 경험’이라는 철 없는 소리 밖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 이 경험을 알겠는가.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이라고는
칠흙같은 어둠, 반짝이며 날아다니는 반딧불,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면 하늘 가득 쏟아질 듯이
빛나고 있는 보석 같은 하얀 별들. 온 몸의 감각에만 의지해서 한 시간 정도 걸어가니 드디어 집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하는데, 집의 불빛에 간신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을 살펴보니 제대로 난 길은 저편에 있고, 알고 보니 이상한 풀 길을
헤치며 걸어가고 있었다는 사실.
   

오메테벡 섬에서 멋진 노을과 함께 3일을 해먹에 누워 뒹굴거리던 생활을 접고 코스타리카 국경으로
가보니, 아침 일찍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형 버스들이 집단으로 도착하는 시간에 딱 걸려서 입국 스탬프를 받기 위해 2시간
넘게 줄을 설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둘 다 너무나 지쳐 번갈아 줄서기를 하고 있는데, 레스토랑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
은화의 눈에 한 낯익은 사람이 보인다. 설마 애럼?. 시선을 조금 옆으로 돌리니 앗! 윌이다!! 연이어 들어오는 친구들.
정신 없이 일어나 무작정 달려가서 매달리며 반갑게 인사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막연한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만나게 되니
거짓말처럼 온몸에 힘이 솟는다. 할 것 많고 볼거리 많은 코스타리카를 단 둘이 보낼 생각에 우울했는데, 이제
다시 무리에 합류하게 되니, 무엇을 한들 재미있지 않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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