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명랑 남미 여행기] 멕시코 따스코를 지나 와하까에서 그레고리오의 사랑고백을 받다


멕시코가 점점 익숙해질 무렵 나는 따스코에 도착해 여정을 풀었다. 해가 저물어 터미널에 도착한 나는 내 한 몸 누일 방을 찾아 밤 거리를 나섰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막을 오르자 여관들이 많이 모여있다는 광장이 나왔다. 가이드북에 나온 몇 군데의 여관에 들렀으나 값이 비쌌다. 결국 하룻밤 만 오천원으로 타협을 보고 맨 처음 갔던 여관에 배낭을 내려 놓았다. 방은 아주 작았지만 무지개 빛깔 담요에 액자가 걸려 있어 아늑했다. 옆 방에는 내 또래의 일본인 네 명이 묵고 있는 모양이었다. 노래를 부르고 장난을 치는 소리가 내 방까지 넘어왔다. 한국에 두고 온 친구들 생각이 났지만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창이 없는 내 방에는 아침 기운이 전혀 없다. 여관에 딸린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주문했다. 간소한 메뉴지만 갓 짠 오렌지 주스는 신선했고 토스트는 고소했다. 만족스러운 아침 식사를 앞에 두고 테라스에 앉아 따스코를 바라본다. 하얀 벽에 빨간 지붕, 오래된 벽돌길과 골목들…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이다. 어제 밤에는 몰랐는데 내가 묵은 여관 이름이 ‘까사 그란데'(Casa Grande), 즉 ‘큰 집’이었다. 큰 집이라면 한국에서 또 다른 의미로도 불리지 않는가! 따스코에서 맞는 아침이 너무나 마음에 든 나는 까사 그란데의 죄수가 되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를 든든히 한 채 거리로 나선다. 은광(銀鑛)으로 유명한 따스코에는 골목마다 은 제품을 파는 가게들로 그득하다. 은 제품을 사라고 내 팔을 잡아 끄는 상인들을 뒤로 하고 따스코에서 가장 좋은 전망을 자랑한다는 과달루뻬 성당으로 향한다. 힘들게 다다른 과달루뻬에서 바라본 따스코는 과연 아름답다. 사진을 찍으며 1시간 정도 놀다가 내려왔다. 다음 들른 곳은 따스코의시장이다. 도살된 소와 닭의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길은 야채 껍질로 미끄럽지만 사람 냄새가 나서 좋다. 어느 시장에나 싸고 맛있는 음식을 파는 곳이 있기 마련이다. 비좁은 시장통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옆에 앉은 여자가 먹는 것과 똑같은 것을 주문한다. 두터운 또르띠야에 새콤하게 양념한 감자와 닭고기를 얹어 먹는 소뻬스(Sopes)다. 단 두 가지 재료가 들어갔지만 아주 맛있다. 6페소(6백원 정도)로 점심을 해결한 나는 본격적으로 시장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한 시간 뒤, 숙소로 돌아가는 나의 손에는 바다에서 입을 원피스, 딸기 10페소 어치, 여자 선원이 방긋 웃고 있는 수건이 들려 있었다. 9000원으로 맛보는 소박한 행복이다.


다음 목적지는 와하까다. 아름다운 콜로니얼 도시란 칭찬을 많이 들었던 터라 출발 전부터 기대가 컸지만 길고 긴 버스 이동 시간 때문에 몸이 지쳐 있었다. 예쁜 파스텔 빛깔의 벽도 기념품 가게도 나의 울렁거리는 속 앞에서는 맥을 못추었다.

와하까에서 가장 이름난 산토 도밍고 성당 앞에 앉아 크고 노란 건물을 멍하니 바라본다. 이제껏 보아온 콜로니얼 건물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벽은 노란 모래빛이고 군더더기 장식 없이 웅장하다. 성당 안을 빙그르르 맴돌다가 밖으로 나왔다. 햇빛은 가차없이 강렬하고 나의 속은 여전히 엉망이다.

“안녕!” 여관으로 돌아가려는 찰나에 오늘의 주인공 그레고리오가 등장한다. 영어를 할 줄 아느냐며 붙임성있게 말을 거는 멕시칸 청년. 스물 다섯 살의 법학도다. 간단히 상대하려 했는데 결국 근처 공원으로까지 가서 이야기를 계속하게 되었다. 모자란 스페인어 때문에 멕시코 사람들의 삶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나는 차라리 잘됐다 싶어 이것저것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멕시코에서는 고등학교까지만 나와도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대학을 가는 젊은이도 상당히 많다고 한다. 대학에 가는 젊은이들의 전공은 대부분 의학, 법학, 회계학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도시 어디에나 의사와 변호사가 넘친다고 한다. 게다가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 위한 자격 요건도 까다롭지 않아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많은 고등학생들이 의사나 변호사가 되고 싶어한다고 말해주자 그레고리오는 매우 놀라는 눈치다.

멕시코와 한국이 갖고 있는 문제들, 문화, 사랑 등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 받다 보니 어느덧 서너 시간이 지나갔다. 그런데 이 멕시칸 청년, 갈수록 이상하다. 은근슬쩍 내 어깨를 만지기도 하고 손을 건드리기도 한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동양 여자와 오래도 이야기를 나눈다 싶었는데 끝내 털어놓는 이야기가 내가 좋다는 거다. 내 웃음 소리가 마음에 든다느니 왜 멕시코에서 태어나지 않았냐느니 아쉬운 표정이 얼굴 한가득이다. 며칠 뒤면 스페인어를 배우러 과테말라로 떠날 예정이라니까 자기가 공짜로 가르쳐주겠다며 가지 말랜다. 더 오래 같이 있자는 것을 부랴부랴 말려서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다음 날에는 와하까 근처의 몬테 알반이라는 유적지를 찾았다. 피라미드는 오직 이집트에만 있다는 나의 무지를 여지없이 깨뜨렸던 테오티후아칸 투어에 이은 두 번째 고대 유적지 답사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허름한 돌 무더기 사이에는 바람과 잡초만이 흩날릴 뿐이다. 오후가 되어서야 와하까로 돌아온 나는 밤 버스로 뿌에르또 에스꼰디도로 떠나기 위해 짐을 꾸렸다. 어제 나에게 고백한 그레고리오 생각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난다. 약속 시간에 맞춰 소칼로로 나가자 그레고리오는 어제보다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내가 안 나올 줄 알았다며 고맙다고 말하더니 잠시 들를 데가 있는데 1시간 정도만 기다려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밤차로 다른 도시로 갈 예정이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그레고리오는 내 이름을 몇 번이나 확인하더니 아쉬운 표정으로 ‘아디오스(안녕)’ 했다.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내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함께 사진을 찍은 뒤 한 장을 선물로 주었다. 마치 아이처럼 좋아한다. 꼭 한국에 찾아가겠노라고 말하며 멀어져 가던 그레고리오. 그렇게 나는 와하까를 떠났고 지금도 가끔 그레고리오의 아쉬운 표정은 나를 웃음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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