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하의 젊은 논리] 토론은 라이브(live)이다

   
 
토론 대통령이 당선된 후유증(?)으로 젊은 논리의 필자도 이참에 토론 얘기로 당분간 버텨볼까
한다. 대통령 선거 이후 TV 토론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 아직은 전보다 높은 것 같다. 공영방송만 하더라도 채널을 통틀어
본다면 요즈음은 거의 매일 토론 프로그램이 하나씩은 있다. 그러나 아직도 토론 능력의 수준은
  천차만별인 것이 사실이다. 어떤 분은 정말 환상적인 토론 능력, 토론의
‘이데아’ 그 자체를 보여주는 분도 있는가 하면, 때로는, 아주 가끔은 왜 저 분이 패널로 선정되었는지 ‘왕 짜증’ 나는
경우도 있는 게 사실이다. 물론 필자의 조급증도 일부 영향을 미쳤겠지만, 어떤가? 여러분도 그런 경우 있지 않은가? “시간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 할 얘기를 다 못해”라든가 아니면 “현장에 가봐, 당황하거나 흥분될 수밖에 없어”라는
등의 말은 왠지 구차한 변명처럼 들릴 따름이다.
 
글을 쓸 경우에는, 대입 논술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종의 ‘녹화 중계’로서 NG를 허용하기 때문에 잘못 쓴 것은 지우고 다시 쓸 수 있지만, 토론은 철저한 ‘생중계’이기
때문에 현장성이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장에서 강해지는 것은 지속적인 훈련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재수나 재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장에 강한 유전자’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스테이지
체질이야!”라는 말은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전적인 것이 아니라 나름의 피나는 훈련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토론은 마치 록 가수들의 라이브 공연과 비슷한 것 같다. 록 가수들은 연속되는 공연으로 몸이 피곤하고 목도 좋지
않아서 빌빌거리는 경우가 가끔 있다. 공연시간이 다가오면 정말 불안하고 미칠 것 같을 것이다. 오죽하면 마약을 하기도
하겠는가? 그러나 그런 상태에서도 무대에 올려 놓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강력한 목소리를 토하면서 펄쩍펄쩍 여기저기 미친
듯이 뛰어다닌다. 그러다 공연이 끝나면 또 빌빌거린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바로 평소에 엄청난 훈련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우리 대중음악계에서 콘서트 문화를 최초로 만들어낸 어떤 록 그룹의 리드싱어인 J씨는 젊을 때,
발성연습을 하면서 악기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팔을 펼 때 팔로 점프하면서 박수치는 팔 굽혀 펴기’를 하면서 ‘학교
종이 땡땡땡’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부르기를 상당 시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연습하다 보니 아무리 상태가 안 좋아도 라이브에서
최소한의 수준 이상은 유지하는 것이다.
 
토론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현장성이 강하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따로 능력을 길러야 하고, 지속적인 훈련만이 그런 능력을 배양시킬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도대체 어떤 능력을 길러야
할까? 물론 표정이나 몸가짐 하나하나도 중요하고, 또 상대방 주장을 이해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자기 생각을 적절하게 주장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토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주장(claim)’을 펼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라이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주장과 연관해서 어떤 능력을 길러야 할까?

첫째는 객관적으로 주장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오해 말아야 할 것은,
이때 ‘객관적’이란 말은 자기의 의견을 제시한다는 의미의 ‘주관적’의 반대말이 아니고, 감정이나 정서를 표출한다는 의미의
‘주관적’의 반대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흥분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분노를 표현하거나 싫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논쟁에서 졌다는 것을 바로 보여주는 표증이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에서는 단순히
말을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안정감 있는 품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반대 주장의 긍정적 의미를 넉넉히 포용하면서도 날카롭게 결정적인 반론을 제기하는 토론의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도를 좀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스턴트 식품은 품성을 조급하게 만든다니 섭생에도 신경 써야 하지 않을까? 이건 좀 오버인가?

둘째, 명료하게 주장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틀린 명료한 주장이
불명료한 주장보다는 백배 낫다. 왜냐하면 틀린 주장이라도 명료하다면 토론을 통하여 바로 잡을 가능성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주장이 명료하다는 것은 애매하거나 모호하지 않다는 것이다. 애매함과 모호함, 어떻게 다를까? 그 차이가 애매모호할지도
모른다. 애매하다는 것은 다의적이라는 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인 것은 분명한데 어느 것인지 모르는 것이다. 반면에 모호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전달되는 정보가 없다는 것이다. 버스에서 친구랑 같이 앉아 있는데
앞에 서있는 남학생이 우리를 보고 웃을 경우를 가정해보자. 나를 보고 웃는지 친구를 보고 웃는지 모른다면, 그것은 애매한
것이다. 그런데 좋아서 웃는지, 음흉한 웃음인지, 아니면 표정이 원래 그런지, 아니면 약간 맛이 간 친구인지 아무 정보가
없어서 도대체 알 수 없다면 그것은 모호한 것이다. 그래도 애매한 것이 모호한 것보다는 좀 더 나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오십보 백보이다.
그런데 실제 우리는 토론할 때 의외로 모호한 주장을 많이 한다. 내 머리 속에는 정보가 들어 있지만 그것이 제대로 전달이
안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필자가 갑자기 여러분에게 “나는 부자다”라고 주장한다고 해보자! 전달되는
정보가 있는가? ‘부자’라는 말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그 말이 어느 정도의 재산 정도를 가리키는지 전달되는
정보가 없다. 그렇다면 그 주장은 모호한 주장인 것이다. 따라서 명료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항상 듣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접근해야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명료한 주장을 위한 기본 조건이다.

마지막으로 모호함의 반대는 자세함이 아니다. 모호함을 피한다고 해서
무조건 자세하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상책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영화관에 영화를 보러 갔는데 표를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고 해보자. 시간표를 확인하러 저 앞 매표구까지 가기 귀찮아서 맨 뒤에 서있는 사람에게 질문을
한다. “영화 언제쯤 시작해요?” 이때 그 사람이 “좀 있다가요”라고 대답한다면 그
사람 대답은 모호한 대답이다. 전달되는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 물론 한 가지 정보가 전달되기는 한다. “나는
네가 싫다” – 그런데 만일 그 사람이 디지털 시계를 꺼내 들고는 버튼을 두들긴 다음에 “14분 24초
32뒤에 시작해요”라고 답한다고 해보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리를 피해야 한다. 그런 지독한 사람
뒤에 있다가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는 그저 “15분쯤 뒤에 시작해요” 하면
충분히 명료한 답변이다. 쓸데없는 자세함은 명료함이 다르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분위기 다운되면 또
돌아온다. (이미 다운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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