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하는 이름, 축구선수 박지수ㅣ지수가 지수에게 묻다

광저우 해외탐방 첫날 늦은 밤 11시, 상하이 상강과 맞붙은 경기가 끝나자 마자 만난 축구 국대 박지수 선수와의 은밀한 대담. 축구선수 지수와 대학생 지수가 묻고 답하다.

<또 오해영>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한 명은 잘나고, 한 명은 그에 비하면 모든 게 그저 그렇다는 설정이었다.

“그래도 해영은 2명뿐이네.”

감상은 뭐든 상대적이라 했던가, 드라마 설정을 듣고 무심코 뱉어낸 말이었다. 내 이름인 지수는 내가 다닌 학교에만 항상 3명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난 90년대엔 전국에서 10번째로 흔한 이름이었으며, 지수라는 이름을 검색하면 20명 이상의 유명인이 나온다. 심지어 한 연예인은 지수라는 본명이 너무 흔해 예명을 쓰게 되었다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항상 누군가의 n번째 지수였다. 김삼순, 길라임, 구준표, 유시진처럼 한 시대를 풍미할만한 이름을 가지고 싶었다. 지수는 그러기에 너무 약하고 흔한 이름 아닌가. 그때 어떤 이들이 대답했다. ‘지수’도 꽤 괜찮다고, 아니 이렇게 훌륭하다고.

국가대표 박지수 선수(광저우 헝다 타오바오, 25)와 황지수 소채리는 그렇게 만났다. 같은 이름을 가졌으나 다른, 타인이 동경하는 삶을 사는 박지수 선수에게 평범한 대학생 황지수 소채리가 광저우에서 질문을 던졌다.

지수(志洙)와 지수(智秀), 다른 세계 같은 이름
황지수(이하 H) 저희 이름이 같아요! 그런데 한자는 다르더라고요.
박지수(이하 P) 어쩌면 다행이네요, 저는 뜻 지()에 물가 수()를 써요.

H        저는 지혜 지에 빼어날 수를 써서 지혜가 뛰어나단 뜻인데 썩 마음에 들진 않아요. 이름이 흔해서 뜻이라도 독특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P        사실 전 제 이름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그렇지만 제 이름을 좋아해요. 왜냐하면 한국 팬과 중국 팬 모두가 쉽게 부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이름이에요. 한국어로도 지수고, 중국어로도 지수라 어디서든 팬을 금방 찾을 수 있다는 게 큰 복이죠. 만약 새로 중국 이름을 지었다면, 적응이 필요했을 거예요. 그럼 지수 소채리는 특별히 갖고 싶은 이름이나 뜻이 있었나요?
H        아뇨. 바꾸고 싶은 이름이나 뜻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딱 한 번 ‘내 이름이 지수가 아니었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있었어요. 고등학생 시절 공부를 꽤 잘했거든요. 대회에서 상도 많이 타고, 도에서 장학금도 받고, 나름 시골 학교의 유망주였어요. 입시원서 9장에 모두 불합격이 찍히기 전까진 말이죠. 자신 있는 건 공부밖에 없어서 그랬는지, 배신감을 이로 말할 수 없더라고요. 아마 그게 제 인생의 첫 실패였던 것 같아요. 지수 선수도 실패한 적이 있나요?
P        저 알고 보면 실패랑 되게 친한 사람이에요. 첫 실패는 인천 유나이티드에서였어요. 나름 유망주에 기대도 많이 받아서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잘 안 됐나 봐요. 입단하고 처음 맞은 겨울, 동계훈련을 앞두고 전화로 방출 소식을 들었어요. 속된 말로 짐 빼라는 소린데 제 짐은 지금 인천에 있잖아요. 그때 고작 19살이었는데 얼마나 속상하던지 인천에 도저히 못 가겠더라구요. 그래서 짐을 몽땅 버려둔 채 팀을 떠났어요.
H        겨울이면 다른 팀들도 이적을 마감했을 텐데……
P        게다가 저는 바로 프로로 가서 대학팀도 없으니 완전 낙동강 오리알이었어요. 그때부터 방황했어요. 고향에 내려가서 맨날 피시방에서 축구게임만 하고. 푸른 잔디 위에서 뛰어야 할 사람은 난데 정작 뛰고 있는 건 모니터 속의 제 캐릭터였죠. 어떨 땐 그 캐릭터가 미치도록 부러웠어요.


경기 직후 광저우의 한 카페에서 박지수 선수와 만났다. 그는 담담하게 자신의 실패를 이야기했다.

실패, 그리고 다시 일어나기까지.

H        저도 그랬어요. 그땐 들인 시간과 노력만큼 보상해주는 게임이 현실보다 낫다고 생각했다니까요. 게임 공간을 벗어나 현실로 나오기까지 정말 힘들었어요. 지수선수는 어떤 계기로 다시 일어섰는지 궁금해요.
P        가족이었어요. 한 번은 제가 아버지께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냐며 대들었어요. 고작 19살이었고 힘드니까,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서 그런 말을 뱉어버린 거죠. 명백히 제가 잘못한 거였는데 아버진 꾸짖지도 않으시고 계속 묵묵히 제 뒤를 지켜주셨어요. 나중에 안 거지만 그때 제가 걱정되고 속상해서 무척이나 힘드셨대요. 그런 제 방황을 끝낸 건 형이었어요. 너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냐며 한마디 하더라고요. 항상 좋은 말만 해주던 과묵한 형이었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그래서 다시 축구화를 꺼내 들고 무작정 누나가 있는 포항으로 갔어요. 가족의 도움과 지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박지수는 없었을 거예요.
H        1년 만에 다시 축구를 하려니 막막했겠어요.
P        정말 눈앞이 캄캄했어요. 그런데 포항에 살던 제 친구가 선뜻 손을 내밀었어요. 덕분에 다음 팀을 찾기 전까지 마음을 다잡고 계속 운동할 수 있었어요. 저를 가상 게임 밖으로 꺼내 준 존재가 가족이었다면, 세상에 세워준 건 친구였던 셈이죠. 지금까지도 힘든 일은 함께 고민해주고 기쁜 일은 저보다 더 기뻐해 주거든요. 세상에 저를 알아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게 항상 든든하고 힘이 나요. 그러다가 K3리그의 의정부FC에 합류했어요. 아마추어 리그다 보니 따로 급여가 없어서 돈을 아끼려고 운동만 했어요. 당시 숙소가 산 근처였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산을 올랐어요. 외박도 안하고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몰라요.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할 것 같아요.
H        대단해요. 사실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잖아요. 힘들었던만큼 경남FC의 입단제의가 더 반가웠을 것 같아요.
P        아주 반가웠죠. 게다가 경남은 부모님 댁이랑도 가까우니까 제가 뛰는 모습을 자주 보여드릴 수 있잖아요. 그게 너무 좋았어요.
H        경남FC에서 태극 마크를 단 순간은 축구선수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을 거 같아요.
P        아뇨.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더라고요? 태극마크를 단 순간이 가장 기뻤을 거라고. 하지만 전 아니었어요. 그건 타인의 기준이고. 제 기준에선 인천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역전 골을 넣었을 때가 축구선수로서, 아니 인생에서 가장 최고의 순간이었어요. 관중석을 향해 제 유니폼을 번쩍 들었는데…… 그때의 기분은 정말, 아무도 모르실 거예요. 어떤 수식어로도 표현 못해요. 아직도 세리머니 하는 꿈을 꾸곤 해요. 진짜 속 시원했나 봐요.


박지수 선수에겐 4년간의 설움이 어려 있는 세리머니였다. (출처: 한국프로축구연맹)

H        그간 지수선수의 모든 인내와 노력, 울분 그런 게 담긴 세리머니였네요.
P        솔직히 좋은 감정만 일 순 없잖아요.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봐라. 이게 내 이름이다.’ 한편으론 그토록 뛰고 싶었던 인천구장에서 다른 팀이 되어 뛰고 있으니 되게 묘하더라고요.

광저우에서 축구선수로 산다는 것은.
H        그땐 광저우에서 뛰고 있을 줄 몰랐겠죠? 제가 지수선수였다면 중국리그라는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했을 것 같아요. 팀에서도 잘나가고 결정적으로 태극마크도 달았으니까
P        제가 광저우에 온 가장 큰 이유는 저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였어요. 축구선수도 사실 똑같거든요. 더 좋은 회사를 찾아서 이직하고, 더 잘 맞는 과를 찾아서 입시를 준비하는 것처럼 저도 더 나은 환경을 위해서 광저우를 선택했어요. 여행을 다니면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진다고들 하죠? 제가 중국리그에서 뛰면서 느낀 감정이 딱 그랬어요. 세계 각국의 선수들과 그라운드에서 발을 맞추면서 정말 많이 배워요. 언제 칸나바로(광저우 헝다 타오바오 감독)라는 선수에게 축구를 배워보고, 각국의 레전드 선수들을 수비해 보겠어요. 정말 볼 때마다 멋있는 사람들이라 한순간도 중국에 온 걸 후회한 적이 없어요.
H        그럼 광저우에서 살면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가족과 떨어져 슬프다든지. 저는 20살 때부터 본가와 많이 떨어진 대학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했는데 정말 좋아요. 솔직히 힘든 점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주변 친구들은 막 안타까워하는데 사실 대학 생활을 100% 즐길 수 있어서 굉장히 만족해요.

광저우는 엄청난 더위만큼 자국 축구 리그의 인기도 펄펄 끓는다! 그런데 오히려 긴 팔을 입는 박지수 선수를 발견하곤 궁금증이 생겼다.

P        솔직히 없는 것 같아요. 정말 만족하고 있거든요. 여기는 야구나 다른 스포츠 리그가 없다 보니 축구의 인기가 정말 높아요. 약 60,000석의 좌석이 항상 꽉 차고 잘해도 못해도 큰 목소리로 구장이 떠나갈 듯 응원해주세요. 요즘 K리그의 인기가 오르긴 했지만 그래도 야구만큼은 못하잖아요. 한국은 구장 객석이 꽉 찬 경기를 보기 힘들어요. 중국에선 오히려 객석이 빈 경기를 보기 힘들어요. 확실히 팬들이 주는 파워를 무시 못 해요. 10분뛸 체력밖에 남지 않았는데 20분 뛰게 되고 그래요. 음식도 괜찮아요. 워낙 종류가 다양하니까 제 입맛에 맞는 거로 골라 먹으면 되겠더라고요. 아, 훠궈는 꼭 드셔보세요.
그래도 힘든 점이라면 광저우의 더위 정도? 실내에선 괜찮은데 경기 중엔 땀이 너무 많이 나요. 그래서 몸이 끈적이니까 그게 너무 싫어서 저는 유니폼 안에 긴 셔츠를 겹쳐 입어요. 적어도 살과 살이 부딪히는 불쾌함이 덜하거든요.

대학생과 축구선수
P        저도 지수 소채리에게 궁금한 점이 있어요. 저는 대학도 안 가고 주변에도 친구가 다 축구선수들이다 보니 일반적인 대학생들의 캠퍼스라이프가 너무 궁금해요. 진짜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미팅도 하고 아르바이트하면서 재밌는 일도 생기고 그런가요?
H        미팅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재밌는 일이 생기는 건 사실인데, 그게 웹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핑크빛은 절대 아니에요. 미팅은 정말 극단적인 것 같아요. 아예 최악이거나 정말 재밌거나. 사실 진짜 최악은 팀플이에요! 웹툰 <치즈인더트랩> 아시죠? 거기 나오는 상철 선배들만 있어요. 교수님들은 하나의 축구팀이 되어 플레이하라는데 다들 경기장에도 오질 않아요. 웃긴 건 동기들하고 얘기해보면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어요. 누군가는 분명 가해자일 텐데! 아르바이트는 업종마다 달라요. 가장 해보고 싶은 아르바이트가 있어요?
P        음…… 저는 서빙이요. 잘 할 거 같지 않아요?
H        면접 가면 바로 뽑힐 거 같아요. 그런데 서빙이 제일 힘든 거 아세요?
P        정말요? 제일 쉬울 것 같아서 골랐는데….. 아 MT는 어때요?
H        동기들이나 친한 선후배랑 가는 건 정말 재밌어요. 서로 밑바닥을 보여주는데 그때 아니면 언제 그래 볼까 싶어요. 저도 MT는 갔다 온 지 오래되어서 기억은 안 나지만 꼰대 선배만 없으면 항상 괜찮았던 거 같아요. 꿀팁이 있다면 취한 친구 챙겨주지 마세요! 전 괜히 챙겨준다고 나섰다가 온몸으로 못 볼 걸 다 치웠다니까요.


대학생이 부럽다는 박지수 선수의 이야기에 진지했던 소채리들, 미팅과 아르바이트라는 단어가 나오자 빵 터졌다.

P        대학 생활을 물어볼 데가 없어서 많이 궁금했는데 즐거워 보이네요. 전 대학생들이 항상 부러웠거든요. 그래도 다음 생에 대학생이 되면 팀플은 안 해야겠어요. 나머지는 꼭 해보도록 할게요.
H        대학생이 부럽다는 게 신기해요. 누구나 선망하고 동경하는 직업을 가지셨잖아요.
P        지수 소채리는 제가 부럽나요? 대학생이 보기에 축구선수는 어때 보여요?
H        부러워요. 항상 스포트라이트 받고 넓은 집, 멋진 차에 포털사이트에 검색하면 나오는 이름 모두가요. 연예인 같은 느낌이에요. 지수 선수가 생각하는 축구선수는 어떤가요?
P        축구선수는 복잡한 직업이에요. 특히 악플을 볼 때 그래요. 저는 악플을 신경 쓰지 않거든요. 그 사람들은 진짜 나를 모르고 남이 보는 나보다 내가 보는 나가 중요하니까. 그런데 상처받는 건 저를 좋아하는 사람들, 제 모습을 아끼는 사람들이에요. 전 괜찮은데 괜히 주변 사람들이 아파하니까 그게 참 슬프죠.
동시에 언제 이렇게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아보나 싶어요. 인천, 경남, 광저우 팬분들 모두 정말 좋은 분들이에요. 제가 어디에서 어느 위치에 있든 끊임없이 응원해주세요. 제가 인천을 상대로 골을 넣은 날 인천 팬분들이 기쁘게 박수를 쳐주셨고, 경남 팬분들은 광저우 경기를 항상 챙겨봐 주세요. 광저우 팬분들도 원정 경기를 다녀온 날 항상 공항을 지켜주시고요. 그분들께 어떻게 하면 더 잘해드릴지 매일 고민해요. 정말 너무너무 감사하거든요. 한 분 한 분 다 못 챙겨드리는 게 죄송할 따름이에요.

광저우 헝다 타오바오 팬들의 엄청난 응원. 처음엔 놀란 소채리들도 곧 광저우 축구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H        지수 선수는 축구선수라는 직업을 참 좋아하나 봐요.
P        완전히요. 저와 주변 사람 모두가 저로 인해 행복한 지금, 정말 감사하고 즐겁게 뛰고 있어요.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떤 아픔과 고통을 감내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런 순간이 있기에 지금의 박지수가 빛나는 거니까요.


이날 인터뷰를 마치고 우리는 박지수 선수에게 소채리 티셔츠를 선물했다.

H        지수 선수랑 이런 얘기를 나누니 정말 재밌어요. 단순히 같은 이름이지만 다른 삶을 살고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광저우에 왔었는데 돌아갈 땐 많은 깨달음과 반성을 얻어서 가네요. 정말 기뻐요.
P        저야말로 감사한걸요. 그동안은 기자분들만 만나서 몰랐는데, 이렇게 같은 또래의 대학생과 얘기하는 것도 너무 좋네요. 저도 정말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국대 박지수 선수의 경기를 보고 싶다면?

국가대표로 발탁된 광저우에버그란데 박지수 선수는 9월 두 차례 경기를 앞두고 있다. 9월 5일 조지아와 KEB하나은행 초청 축구 국가대표팀 친선경기, 9월 10일 투르크메니스탄과 2022년 FIFA 카타르월드컵 2차 예선 경기가 그것이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의 프로 정신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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