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래 | 최고의 날라리

2014년 1월, 꿈을 찾는 스무 살들이 속속 모인 LG드림챌린저 캠프. 그곳에서는 자신의 분야에서 꿈을 이룬 최고의 사람들, 드림 멘토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발견한 것은 그들이 이룬 크고 높은 꿈보다, 열정을 다한 이들의 얼굴에서만 찾을 수 있는 빛이었다.

사진_ 민성근/제19기 학생 기자(인하대학교 경제학과)

‘할 게 없고 심심해서 춤을 시작했다. 배우기보다는 직접 부딪쳐 경험했다. 그리고 이제 11학번으로 새로운 꿈을 꾼다.’ 그의 강연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했고, 거창한 수식도 없이 솔직했다. 그렇기에 강연장에 모인 드림챌린저들은 더욱 집중했다. 스스로를 최고의 날라리라 칭한 그, 바로 강원래의 이야기였다.
강원래 씨가 LG드림챌린저 드림 멘토로 초청되어 강연을 하고 있는 모습. 강단 위에 올라선 그가 휠체어에 앉아 한 손으로 마이크를 쥐고 그를 위해 마련된 테이블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검은 후드티셔츠를 입은, 편안한 모습이다.

강의명 다시 꾸는 나의 꿈
강사명 강원래
강의 일시 2014년 1월 21일 화요일)
강의 장소 하이 서울 유스호스텔
주최 LG 드림챌린저
날라리, 스스로 기회를 잡다

LG드림챌린저 캠프에서 강원래 씨가 강연을 하는 모습. 단상 위의 큰 화면 위에는 강원래의 옛날 모습이 담긴 사진이 보이고, 그 옆에서 강원래가 사람들에게 강연을 하고 있다. 엘드챌 대원들이 연두색과 분홍색 후드 티셔츠를 입고 강연을 듣고 있다.  이야기는 그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큰 사업을 하던 집안이 망하고, 포항에 살던 온 가족이 흩어져 서울로 상경해야 했다. 전학 간 국민학교에서는 ‘촌 사람’으로 놀림 받았다. 책을 읽어도 친구들이 웃었고, 이름으로도 놀림 받았다. 그는 바로 그 때부터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말수가 적어지고,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갔어요. 일진들과 어울리고 담배를 피웠고요. 영화 속 악당들이 악해지는 이유와 비슷한 거였어요. 강해 보이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관심 받고 싶은 거였죠.”

중학생이 되어 그는 구준엽을 만났다. 그 덕분에 학교 생활이 즐거워졌다. 상처를 공유했고, 춤과 그림으로 친구가 되었다. 나이트클럽을 다니며 춤을 추러 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한번도 댄스 학원에서 춤을 배워본 적은 없었다.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수십, 수백 번 따라하며 몸에 익혔을 뿐.

소위 명문으로 꼽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그의 날라리 생활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당시 그의 담임 선생님은 말했다. ‘날라리가 좋으면 날라리로 먹고 살아라. 대신 세상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멋진 날라리가 되어라.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라고. 그 길로 그는 최고의 날라리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구준엽과 함께 더 열심히 춤을 췄고 평소 재능이 있던 미술도 계속했다. 그리고 실기 장학생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그의 첫 꿈이 이루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대학 교육은 자유분방하던 그에게 맞지 않았다. 예술에 있어서까지 획일적이고 교과서적인 교육에 불만이 많이 생겼다.

결국 그는 대학을 관뒀다. 그리고 춤에만 몰두했다. 90년대에 한창 유행하던 디스코 대회마다 우승을 휩쓸었다. 이미 프로로 활동하던 이주노, 양현석을 2등으로 제쳤다. 프로에게는 없던 풋풋하고 도전적인 느낌이 관객들의 박수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날,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를 얻었다. 현장에서 SM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사장이 직접 캐스팅 제의를 해온 것이다.

“1등을 하고 기뻐하던 우리에게 ‘Where are you from?’이라며 물었죠. 한국어로 대답하니 놀라더라고요. 이 춤은 아직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않은 춤인데 어디서 배웠냐고 말이죠. 이태원에서 흑인들한테 배웠다고 대답했어요.”

직접 부딪혀 배운 춤 실력으로 그는 행운을 잡았다. 그조차도 꾸지 않았던 꿈이 절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야말로 하늘이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운 셈이었다.

비정상에 정상적으로 반응하기

강원래가 강단 위에서 강연하고 있는 모습. 푸른 하늘 사진이 강단 위 스크린 속에 보이고, 그 옆에서 강원래가 휠체어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다.  ‘현진영과 와와’로 인기를 얻으며 1년 여 가수 생활을 했던 그는 이후 군대에 갔다. 역시 오랜 친구 구준엽과 함께였다. 가수 경력이 있었기에 연예 병사로 활동할 수 있었다. 군대에 있으면서도 그는 춤을, 그리고 다른 것들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 어느 자리에서든 뭔가를 얻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했어요. 군대에서도 다르지 않았죠.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제일 잘하는 것이 바로 춤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두 번째로 준엽이라는 평생친구를 얻었죠. 그리고 세 번째는 바로 지금 아내와의 사랑이에요. 이 때 쓴 편지가 천 통이 넘더라고요.”

제대 이후 그는 여러 가수들의 춤을 담당하며 현장에서 뛰었다. 그러던 중 다시 한 번 연예 기획사의 눈에 들었다. 그렇게 그는 클론으로 다시 한번 화려하게 데뷔했다.

클론의 인기는 대단했다. 데뷔곡 ‘꿍따리 샤바라’에 이어 ‘돌아와’, ‘초련’까지. 그 제목만 들어도 신이 나는 명곡들을 줄줄이 뽑아냈다. 인기는 국내를 넘어 해외로도 뻗어나갔다. 일본, 대만에서 처음으로 한류 열풍을 이끌어낸 것이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그는 신호 위반 차량과 충돌하는 대형 사고를 입었다. 몸에서 가장 강하다는 대퇴부 뼈까지 모두 부러져 12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받고, 2주나 지나서 정신을 차렸다. 중환자실에 있으면 매일같이 간호사들이 사인을 받으러 왔다. 그렇게 중환자실에 있던 중, 하반신 마비라는 결과를 알게 되었다. 힘든 현실에 감정 조절이 쉽지 않았다. 물건을 집어 던졌고, 크게 소리치며 욕을 했다. 이후 그는 병원에서 기피하는 환자가 됐다.

“제 스스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어요. 장애인은 불쌍하고, 능력도 없고 잘 못 살고, 지구에서 필요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었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볼 것 같았어요. 그런 눈으로 저를 보는 게 싫었고요. 매일같이 ‘뭘 봐’라는 말을 달고 사는 ‘뭘 봐 인생’이었죠.”

최고의 스타로 박수받던 그가, 혼자서는 화장실도 가지 못해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게 너무나도 창피했다. 그래서 혼자 화장실에 가기를 시도했다. 그런데 휠체어에서 변기로 올라앉던 중 다리가 미끄러지면서 밑으로 떨어졌다. 더러운 화장실 바닥에 누워 그는 천장을 보며 울었다. 창피하고 아파서가 아니라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쏟아졌다.
강원래의 강연 모습. 강단 위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그를 많은 엘드챌 대원들이 바라보고 있다.
한참을 울던 중 응급 상황에 누르는 벨이 보였다. 그렇지만 누를 수 없었다. 간호사가 오면 온 병원에 소문이 날까 무서웠다. 결국 또 다시 혼자서 시도했다. 재활 단계에서 아직 배우지도 않은 휠체어 오르기를 시도했고, 겨우 성공했다. 그렇게 다시 병실로 돌아가기까지 총 5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이젠 웃음이 났다.

“혼자서 휠체어에 오르고 화장실을 다녀왔다는 것에서 내가 뭔가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것도 못하는 게 아닌 거죠. 지금도 가끔 힘든 일이 있을 때는 그 화장실을 생각해요. 인생의 밑바닥을 보고 다시 올라왔던 그 때, 살려고 노력했던 그 기억을 떠올립니다.”

재활 병원을 마친 후에는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거기서 그는 지금까지 그의 반응이 모두 정상적인 것이었음을 이해했고 다시 삶의 의욕을 얻었다. 그리고 스스로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기로 마음먹었다. 울고 싶으면 울었다. 아무리 크게 울어도 5분 이상 울지 못했다. 말도 많이 했고, 웃기도 많이 웃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인정하고 변해갔다.

“내 인생에 큰 힘든 일이 생겼는데 마냥 긍정적일 수는 없어요. 그게 비정상적인 사람이죠. 이럴 리가 없다고 부정도 하고, 화도 내다가 결국 죽음까지 생각하게 돼요. 그 과정을 모두 거친 다음에야 겨우 수용을 하는 겁니다. 이게 저에게는 5년이 걸렸어요. 방황도, 싸움도 많이 했고, 자살까지 생각했었죠. 그런데 그게 정상인 거에요.”

꿍따리 샤바라 빠빠빠

하반신이 마비되었지만 그는 춤을 계속했다. 비장애인 댄서들과 휠체어 댄스를 연습했고, 다같이 홍대 클럽으로 나섰다. 그들 모두가 버스, 지하철, 택시 어디에서든 휠체어에서 내리지 않았고, 화장실도 휠체어를 타고 갔다. 친구들은 그 때문에 더 열심히 휠체어를 타줬고 그것이 그에게 큰 힘이 됐다.

그렇게 힘을 얻은 그는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장애가 있지만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며 기운을 냈고, 춤과 노래를 하고 싶어하는 장애인들을 모아 그 꿈을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그가 단장으로 있는 ‘꿍따리 유랑단’의 시작이었다.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못 하는 게 아니에요. 마음이 불편해서 못 하는 거지. 그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이 내가 스스로 갖고 있던 편견이었고, 그것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내 꿈이었어요.”

LG Dream Challenger라고 쓰여 있는 흰색 벽을 뒤에 두고, 강원래가 형광노랑색 패딩 점퍼를 입고 휠체어 앞에 앉아 웃고 있다.  그는 지금 11학번으로 다시 대학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그토록 관심 있고 좋아하던 연출을 공부하고 있다. 댄스 아카데미도 운영한다. 벌써 출신 가수들이 꽤 되는 강릉에선 유명한 학원이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는 그는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충고했다.

“꿈꾸는 사람은 만들어지길 원해서는 안돼요. 스스로를 깎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계속 만들어지기만 원하는 건 그걸 진짜로 원하고, 평생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에요.”

강연의 마지막, 그는 클론의 데뷔곡 ‘꿍따리 샤바라’ 덕분에 그가 잘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고의 날라리로 그 꿈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꿍따리 샤바라의 가사 속에 있었다고.

“누구나 세상을 살다 보면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어. 그럴 땐 나처럼 노랠 불러봐. 꿍다리 샤바라 빠빠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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